미간을 찡그린채 다가오는 청년을 잠시 바라보던 설지는 숙부의 소매 자락을 살며시 쥐고 흔들었다. 나운학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청년을 향해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다가 설지가 자신의 소매 자락을 흔들어대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숙여 설지를 내려다 보았다. 숙부의 소매 자락을 흔들어대던 설지는숙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작은 목소리로 숙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숙부! 저기 오는 저 오빠 몸속에 아주 아주 나쁜 기운이 들어 있어. 무지 나빠!"
"그래? 흠..."

설지는 나름대로 소리죽여 말한다고 속삭였지만 설지의 주위에 있던 일행들의 귀에는 설지의 이 말이 또렷이 전해지고 있었다. 일행들은 지금 까지 설지와 동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설지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인해 설지가 다가오는 청년을 향해 내뱉고 있는 말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깨닫고 안색을 굳히며 자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침내 성수의가 일행들이 서 있는 곳 반장 정도 앞에 다다른 준수한 용모의 청년은 성수의가 일행들 중에서 먼저 소림의 혜명 대사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대사님! 그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청년의 포권지례를 받은 혜명 대사는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띄면서 청년의 인사를 받았다.
"허허허. 오래만이외다. 곽시주! 그래, 춘부장께서도 건강하시지요?"
"예. 대사님 덕분에 무탈하십니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혜명 대사와 인사를 나누는 청년은 바로 하남 표국의 소국주인 곽철승이었다. 소림사의 지척인 등봉현에서 하남 표국을 운영하고 있는 표국주 곽인뢰의 독자로 태어난 곽철승은 올해 갓 약관이 지난 어린 나이로 하남 표국을 번창일로 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뭇처녀들의 방심을 자극할 정도로 준수한 용모와 그에 어울리는 타고난 사업 수단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로 인해 하남 표국은 표국이 생긴 이래 가장 높은 성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장래 중원 최대 표국주가 하남성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회자되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혜명 대사는 곽철승과의 수인사가 끝나자 곧 그를 성수의가 일행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나신의! 이분 시주는 하남 표국의 소국주인 곽철승 시주이외다. 인사나누시구려."
혜명 대사의 소개로 수인사가 끝나자 설지의 손을 잡고 있던 성수신의 나운학은 대뜸 곽철승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곽소협! 내 한가지 물어볼게 있소이다. 여기 이 세람이 혈사교의 잔당들이라는걸 알고 있었소?"

수인사를 나누며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던 장내의 분위기가 나운학의 이 질문 하나로 다시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수신의 나운학으로 부터 돌연한 질문을 받은 곽철승은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신색을 바로하고 정중하게 나운학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신의께서 방금 보셨듯이 이들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제가 알았다면 아니 우리 표국에서 이들의 정체를 미리 알았다면 이들을 표사로 고용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테지요. 이 점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고도 공손한 곽철승의 말을 들은 나운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세명의 표사를 잠시 살핀 후 굳은 얼굴로 곽철승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요. 하남 표국에서 알고도 이들을 표사로 고용했을리는 없다고 믿습니다. 허면 이들은 우리 의가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는지요?"
"예. 그렇게하십시요. 성수의가에 죄를 지은 이들이니 성수의가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나운학과 곽철승의 대화가 이렇게 진행되자 쓰러져 있던 세사람의 표사 중에서 하나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곽철승을 향해 말했다.
"이보시오. 소국주, 그게 무슨말이요? 어찌 당신이 그럴 수 있소. 당신이..."
하지만 분기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표사는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말문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 표사의 눈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공포였다. 그 표사의 귀로 곽철승이 날린 전음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 아가리 닥쳐라. 함부로 입을 놀리면 네놈들 처자식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곽철승은 나운학과의 대화 도중에 짧은 틈을 이용하여 전음을 날린 후 거만한 표정으로 표사를 한번 쏘아본 후 다시 나운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곽철승은 자신이 날린 전음을 장내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단 한사람만은 예외였다. 나운학의 손을 잡고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설지의 귀에 곽철승이 날린 전음이 그대로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철승의 전음을 듣고 난 후 더욱 미간을 찡그린 설지는 잡고 있던 숙부의 손을 가만히 당겨 흔들었다. 설지의 행동에서 무엇인가 짐작가는 것이 있었는지 나운학은 곽철승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고는 철무륵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제 볼일은 끝난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 그럼 내 차례구먼."

나운학의 뒤에 서 있던 철무륵은 나운학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고는 한발 앞서 나오며 곽철승을 향해 광망을 쏘아 보냈다.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던 장내는 철무륵에 의해 또 다른 긴장감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운학의 곁에 선 철무륵은 곽철승을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낸 후 이렇게 말했다.

"곽소협! 나 산적 두목 철무륵이요. 내 물어볼게 있소이다."
"위명이 쟁쟁하신 녹림 총표파자를 면전에서 뵙게 되다니 금생에 영광입니다. 하문하시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내 묻겠소이다. 하남 표국은 녹림과 척을 지기로 한 것이요?"
"하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해라... 우리 녹림 식구들을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서 두명의 녹림 식구가 저승길로 갔소이다. 이에 대해 해명해주시겠소?"
"해명이랄 것 까지는 없고 단지 저희 표국은 불법적인 일과는 더이상 타협을 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분의 녹림 호걸들이 아까운 생을 마치셨는데 그건 그들이 너무 격렬히 대응을 하셨기에..."
"크하하하, 불법적인 일이라... 좋소이다. 귀 표국의 뜻 충분히 알아들었소이다. 하남 표국이 녹림에 진 빚을 내 기억해 두겠소이다. 내 장담하건데 그 빚은 몇 곱절로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오. 크하하하."

곽철승과 대화를 나누던 철무륵은 더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함을 깨닫고 곽철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소를 터뜨리며 녹림의 뜻을 전달한 후 미련없이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는 철무륵의 전신으로 무시 무시한 기운이 휘몰아 치기 시작했다. 하남 표국과 녹림의 분쟁이 앞으로 강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무륵과 곽철승의 대립으로 어색해진 장내의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소림사의 혜명이 나서서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 허허허, 자자 고정들 하시고 어서 부상자들을 살펴보시고 장내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허나 혜명 대사의 이런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성수의가의 의원들과 일꾼들은 장내의 모든 부상자들을 한쪽으로 옮겨 놓고 치료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부산스런 움직임에 의해 장내가 대충 정리가 되어 갈 즈음 이전 처럼 활기를 되찾은 설지가 나운학을 향해 말했다.
"숙부, 숙부. 저기 저 오빠, 아까 이상한 말을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했는데 왜 그런거야?"

설지는 관도 저편의 하남 표국 쪽으로 걸어가는 곽철승의 뒷 모습을 바라 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숙부에게 물어 보았다.
"그래 무슨 말을 하더냐?"
"응, 응. 그게.. 함부로 입을 놀리면 네놈들 처자식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어."
"그래? 흠... 자세한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아마도 저놈들의 식솔들이 하남 표국의 인질이 되어 있나 보구나.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거라."
"응, 응. 그런데 산적 숙부에게도 비밀로 해야돼?"
"산적 숙부에게는 내가 말씀드리마."
"응, 응. 알았어. 설지는 이제 가서 초아가 쉴 자리 찾아 볼거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거지?"
"그래. 부상자들 때문에 부득이 오늘은 여기서 하룻 밤 묵어야 할 것 같구나."
"응, 응. 알았어."

대답을 한 설지는 백아와 호아와 함께 성수의가의 마차 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설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 보던 나운학은 조금 떨어져 있던 장총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 가며 장총관을 불렀다.
"장총관! 혈사교의 잔당들을 본가로 압송해야겠소. 준비해주시오."
"예. 가주님, 이미 단전을 폐하고 단단히 결박하여 마차에 태워 두었습니다."
"놈들의 감시를 철저히 하시고 제 허락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압송은 어떻게 하실련지.."
"내 생각해둔게 있는데 성도에 가서 관군들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아! 그러면 되겠군요. 그럼 본가의 어르신께 전서로 알려드려야겠군요. 전서구를 준비할까요?"
"아닙니다. 설지가 키우는 비아를 이용하는게 전서구 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가주님. 그러면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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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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