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지난 밤 소림의 기연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철장산 중턱의 넓은 공지는 부산한 소음과 함께 깨어나기 시작했다. 소음의 정체는 성수의가에 소속된 일꾼들이 간밤에 풀어 놓았던 짐을 챙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공지의 중간 쯤에서 무당의 도사 십여명이 권법 수련을 하면서 내는 낭랑한 기합성이 더해져 일으키는 소란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광장의 또 다른 한켠에서는 지난 밤 기연을 맞이 했던 소림 십팔 나한이 초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원진을 구성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원진을 형성한 소림 십팔 나한들은 초아에게 등을 맡긴채 바깥 쪽을 보고 앉아 초아를 은연중에 보호하는 대형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이른 아침의 산중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소란은 초아와 가까운 곳의 천막 속에서 입을 딱 벌리고 늘어져 잠들어 있던 설지의 귓가에도 어김없이 당도하여 귓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결국 늘어져 잠들어 있던 설지는 소란스런 소리들에 어쩔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한차례 하품을 하고는 천천히 걸어 천막에 드리워진 문 역할을 하는 천을 옆으로 살짝 걷고 머리를 내민채 바깥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설지의 머리 아래로는 하얀 머리 두개가 거의 동시에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고 부스스한 설지의 머리 위에는 뿔달린 작은 녹색 머리 하나가 자리한채 역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천막 속에서 머리만 내민채 잠이 덜깬 눈으로 소란스런 소리의 정체를 살피던 설지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순간적으로 초롱초롱한 빛을 내는 것 같더니 불쑥 천막 속에서 뛰쳐 나가며 이렇게 외쳐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우와. 태극권이다. 태극권, 구경, 구경"

허겁지겁 달려 나가던 설지는 소림 십팔나한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던 초아 쪽을 향해 한소리를 외치며 무당 도사들이 태극권을 시전하고 있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초아! 잘잤어? 이리와"

달려나가는 설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채 지기를 흡수하고 있던 만년삼왕 초아는 순식간에 땅에서 빠져 나와 설지를 향해 뿌연 몸을 드러낸채 날아가 설지의 가슴에 안겨 들었다. 처음 땅에서 솟아나올 때는 어른 팔뚝만한 크기였던 초아의 몸은 설지의 가슴에 다다를쯤엔 어느 사이엔가 작은 풀뿌리 마냥 작아져 있는 모습이었다. 

초아가 가슴에 자리잡는 것을 지켜 보던 설지는 태극권을 시전하고 있는 무당 십이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 이리 저리 둘러 보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도사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스님 할아버지도 잘 주무셨죠? 두분 숙부님도 간밤에 평안하셨죠? 교언니 안녕"

폭포수 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로 사방을 향해 인사를 건넨 설지는 백아를 품에 안고 무당 십이검의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무당 십이검이 시전하는 태극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지가 막 자리에 앉을 무렵 지난 밤 동안 초아와 함께 하며 기연을 겪었던 소림 십팔 나한들도 지난 밤 동안 지켰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설지 곁으로 다가온 후 정중하게 반장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아미타불! 소림의 십팔 나한을 대표하여 소승 공각이 성수의가의 소공녀께 깊은 감사를 드리오이다."
"응? 으응, 아하하하, 됐어요. 됐어. 나중에 스님 할아버지가 제 부탁 한가지를 들어 주신다고 했으니 그걸로 됐어요."
"아미타불! 빈승 혜명도 소공녀께 감사드리오이다. 소림이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어느새 다가온 혜명 대사가 공각의 말을 거들며 이렇게 말하자 마지못한듯 설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불쑥 이렇게 혜명 대사를 향해 질문을 날렸다.
"아참, 스님 할아버지, 심법의 이상한 부분들은 고칠 수 있었어요?"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소공녀. 소림 십팔 나한들이 지난 밤에 겪었던 운기 행공을 바탕으로 잘못된 금강 부동 심법의 구결을 완전하게 고칠 수 있었소이다. 다시 한번 소림의 이름으로 감사드리오이다."
"응! 응! 잊어버리지 마세요. 제 부탁 들어준다고 했던거"
"허허허, 물론이지요. 소림의 기둥 뿌리라도 뽑아드릴 수 있소이다."
"헤헤헤. 기둥 뿌리는 필요 없어요."
"허허허"

혜명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설지는 다시 장내에서 시전되는 태극권으로 주의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런 설지의 입에서는 간간히 탄성이 뱉어지고 있었으며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감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무당 십이검이 펼치는 태극권은 시중에 전해지고 있는 일반적인 태극권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정잡배들 까지도 능숙하게 전개한다는 무당 태극권이 정작 무당 십이검에게서 시전되자 그 위력이 판이하게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우와. 멋져"

일성 도장의 옆에 앉아서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태극권을 유심히 살펴보던 설지가 어느 순간 부터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의문에 가득한 눈으로 태극권을 시전하는 무당 십이검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 것은 태극권의 진행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당 십이검을 지켜보던 설지는 품속의 백아를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고는 이렇게 불쑥 내뱉었다.
"그렇지?"

의미를 알수 없는 말을 내뱉는 설지의 모습을 본 백아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아래 위로 주억거렸으며 설지의 곁에서 등을 바닥에 두고 배를 하늘로 향한채 고개만 옆으로 돌린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늘어져 있던 호아도 설지의 의문 가득한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지의 입에서 그렇지라는 소리가 나올때 부터 설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일성 도장은 설지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을 깨닫고는 이내 입을 열어 설지에게 질문을 했다.

"설지야. 왜 그러느냐? 뭐가 잘못된게냐?"
"응! 응! 할아버지, 저 보표 아저씨들 이상해."
설지에 의해 졸지에 보표가 되어 버렸던 무당 십이검도 어느 사이엔가 태극권의 시전을 멈춘채 설지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게냐?"
"응? 응! 태극권을 시전하면 주위를 흐르는 자연의 기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내공과 합쳐지기 시작하고 태극권을 시전할 수록 모여드는 기운들과 내공의 합일이 늘어나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저 보표 아저씨들은 모여든 자연의 기운을 그냥 흩어버리고 있어요."
"뭐, 뭐라고. 그게 무슨말이냐. 내공과 합일이라니"
"응? 아이참. 할아버지도 모르시고 계셨어요?"
"그, 그래. 자세히 설명해보려무나."
"음, 음, 그냥 제가 보여드릴께요. 헤헤"

설지와 일성 도장의 대화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의 가운데로 걸어 나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 전파되어 있는 무당 태극권에 숨겨진 모용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설지의 입을 통해서 들었으니 설지가 펼칠 태극권이 무척 기대되었던 것이다.

공지의 가운데에 선 설지는 익숙한 자세로 태극권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투로가 진행될수록 묘한 기운이 설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더니 중반을 넘기면서 부터는 설지가 권장을 펼칠때 마다 반장 정도 앞의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팡, 팡"

그 소리는 분명히 권풍이 일으키는 소리였으나 무당 십이검이 펼칠때는 발생하지 않았던 현상이었다. 그리고 설지의 양손이 아래 위를 번갈아 오르내리며 공처럼 둥근 원형을 형성하기 시작하자 그 원형속에서 뿌연 기운이 생성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선명히 드러났다. 처음에는 미약한 뿌연 기운이던 그 원형의 기운들은 설지의 양손이 아래 위로 몇번 더 오가기 시작하자 밝은 색의 빛무리를 이루며 확연한 원의 모습을 갖추더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철무륵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가장 먼저 튀어 나왔다.
"저, 저게 뭐야."
"아미타불! 아무래도 강기로 만들어진 구 같소이다."

여기저기서 놀란 음성들이 튀어 나올때 정작 강기로 제법 커다란 구를 만들어 버린 설지의 입에서도 당혹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으악, 이거 너무 커졌다."
그때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강기를 날려 버릴 곳을 찾던 설지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늘어져 있는 호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호아! 이거 받아"

설지의 지명을 받은 호아는 느리게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어 거절하였으나 곁에 있던 백아의 앞발이 엉덩이를 툭 치자 어쩔 수 없이 설지의 반대 편으로 걸어가 이장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섰다. 설지는 자신의 앞에 호아가 와서 서자 양손 사이에 만들어진 강기의 구를 호아를 향해 냅다 날려 버리며 이렇게 외쳤다.
"사랑과 협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얍"

설지와 호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똑똑히 볼수 있었다. 이장 정도 떨어진 호아를 향해 설지가 날려 버린 강기의 구가 마치 절대지경에 달한 검의 절대고수가 검강을 날려 버린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날아가는 것을...

하지만 더욱 경악할 일은 호아에게서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밝은 빛의 강기로 만들어진 구를 향해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린 호아가 강기의 구를 냅다 후려쳐 버리자 강기의 구가 산산히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호아도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호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설지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 나와 주위의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만세! 내가 이겼다. 우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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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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