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앙증이 아닌 방정맞은 웃음과 함께 폴짝 폴짝 뛰며 좋아하는 설지의 모습과 반대로 일성 도장을 비롯한 장내의 인물들은 방금 설지가 보여준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하였다. 특히 무당의 인물들이 느낀 경악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지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일성 도장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허, 무당아, 무당아..."

허공을 올려다 보며 탄식을 토해내던 일성 도장이 금새 신색을 회복하고는 설지를 향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어느 틈엔가 설지의 곁으로 다가 가고 있는 교혜린에 의해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설지의 장포를 든 교혜린은 설지에게 다가가 머리에 알밤 하나를 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요녀석! 아무리 급해도 옷은 챙겨 입고 나와야지. 그 차림이 뭐니?"

교혜린의 말에 알밤 맞은 머리를 쓱쓱 문질러 가던 설지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 보며 말을 하다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커다란 비명성을 토해내더니 몸을 돌려 순식간에 천막 속을 향해 사라져 버렸다. 설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설지가 남긴 한마디 말만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응? 내 옷차림이 뭐 어때서...으아아악!"

늘 꽃무늬가 수놓아진 반팔 상의와 발목 위에서 끈으로 묶게 되어 있는 역시 같은 꽃무늬가 수놓아진 하의로 이루어진 잠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설지가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나서 옷을 갈아 입는 것을 깜박 잊어 버린채 사람들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태극권을 시전해 보였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설지의 모습을 보던 철무륵이 호탕한 웃음 소리가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크하하, 녀석! 실컷 다 보여 줘 놓고 내뺄건 또 뭐냐. 크하하"

철무륵의 웃음 소리와 함께 다시 깨어 나기 시작한 아침의 공지 위로 일성 도장의 침중한 웃음 소리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일성 도장은 설지가 사라져 간 천막 쪽을 한차례 바라 보다 무당 십이검을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허허, 오늘 우리 무당이 안계를 넓히는 정도가 아니라 기연을 만난 날인 것 같구나."

일성 도장의 진중한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대제자인 청진이었다.
"예. 사숙조님,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무당의 태극권에 그런 묘용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허허, 조사님 뵈올 면목이 서질 않는구나. 허허허"
일성 도장과 무당 대제자 청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명 대사의 마음 속에서는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본사의 금강권에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혜명 대사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생겨난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반드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일성 도장과 마찬가지로 설지가 사라져 간 천막을 한차레 훑어 보았다. 한편 천막 속으로 눈썹을 휘날리며 뛰쳐 들어 왔던 설지는 잠옷을 갈아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후에야 백아를 품에 안고 천막 속에서 걸어 나왔다. 설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철무륵은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크하하하, 그 놀라운 경신술은 언제 배웠느냐? 극상승의 이형환위를 보는 듯 하더구나. 크하하"
"씨, 철숙부, 잊어, 잊어. 자, 자, 내 손을 보세요. 빨간 해! 빨간 해!"
"응? 빨간 해가 무어냐?"
"응, 응, 기억을 잊게 하는 설지의 주문이야. 주문, 빨간 해! 얍! 얍!"
"기억을 잊게 한다고 그럼 혹시 파란 달 같은 주문도 있더냐?"
"응? 우와. 철숙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파란 달은 잊어 버렸던 걸 생각나게 하는 주문이야."
"크흐흐, 그럴줄 알았다. 파란 달! 파란 달! 파란 달! 크하하"
"크아악, 철숙부"

철무륵과 설지의 말 다툼을 지켜 보며 미소를 짓던 일성 도장이 그제서야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지야! 조금 전의 태극권은 어떻게 된 것이더냐?"
"응? 아! 할아버지, 그거 별거 아냐. 전에는 몰랐는데 아까 저 보표 아저씨들이 펼치는 태극권을 보다가 알게 됐어요. 원래 태극권은 천지간의 기운들을 자연스럽게 시전자의 몸으로 모여들게 하는 효용이 있나봐요. 주위에 모여든 자연지기들을 시전자가 자신의 내공과 함께 합일하여 펼치면 되는거예요."
"천지간의 기운들을 불러 모은다고?"
"예. 태극권을 시전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지기들이 모여들어요."
"허허허,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구나. 그래 그건 그렇고 넌 언제 태극권을 배웠더냐?"
"아! 그거요."

말을 하던 설지가 주위를 둘러 보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응, 저기 있는 삼삼 아저씨 한테 배웠어요."
설지가 가리킨 곳에는 의행 길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숙수인 왕삼이 서 있었다.
"왕숙수에게?"
"응, 응, 근데 배우다가 이상해서 관뒀어요."

때 마침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치 대죄를 지은 듯 한 표정의 왕삼이 서둘러 일성 도장의 곁으로 와서 설지가 태극권을 배우게 된 경위를 알려 주었다.
"도장 어르신, 소인이 가끔 운동 삼아서 태극권을 펼치던 모습을 본 아가씨께서 어느 날 문득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소인이 알려드렸습니다. 소인은 그저 세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태극권을 알려 드렸을 뿐인데 태극권을 능숙하게 구사하시게 된 아가씨 께서 무언가 이상하다시며 태극권 펼치는 것을 관두셨습니다."
"그랬었구려. 설지에게 하나만 더 물어보자꾸나"
"응, 응 그러세요."
"세간에 전해지는 태극권이 어디가 이상하더냐?"
"응, 응! 태극권을 시전하면 주위의 기운들이 갑자기 요동치며 원활한 전개를 방해했어요. 그래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표 아저씨들이 시전하는 것을 보다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조화라고?"
"응, 응! 그러니까 태극권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가면서 천지간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어 시전해야 하는데 세간에 전해지는 태극권은 너무 형식에만 치우쳐 있어 흐름이 방해 받고 있어요."
"허허허, 그랬구나. 그럼 내게 그 조화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그럴께요. 밥먹고 나서, 히히"
"허허허, 그래 그럼, 밥이나 먹어 보자꾸나."

한바탕의 소동이 마무리 된 후 장내가 정리 되자 사람들은 식당 천막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틈에는 설지의 모습에 놀란 장포두와 왕포쾌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에 의해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하자 왕삼과 주방 보조들에 의해 아침 식사가 식탁 위에 자차려지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가 거의 다 차려질 무렵 나운학은 식당 안을 둘러 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동할 것 입니다. 상직현으로 들어가는 성문의 입구 쪽에 있는 벌판에서 며칠간 숙영하며 상직현의 환자들을 살펴 볼 계획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나운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숙부를 바라 보던 설지가 냉큼 입을 열었다.

"숙부, 숙부, 그럼 오늘 점심은 객잔에 가서 먹어."
"응? 객잔에 가고 싶은게냐?"
"응, 응, 객잔에 가서 맛난 요리 잔뜩 먹으며 서책에 나오는 객잔 풍운 같은 걸 경험해 볼거야."
"크하하. 객잔 풍운이라. 그거 좋구나. 크하하"

철무륵의 호탕한 목소리가 설지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자 나운학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다들 함께 가서 객잔 풍운을 경험해 보자꾸나."
'만세, 우헤헤. 삼삼 아저씨! 아침 잘 먹을께요.'

성수의가의 행렬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서둘러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마차 두대에 나누어 실은 성수의가의 행렬이 산 아래를 향해 내려 가기 시작한 것은 반시진이 자나서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예의 깃발과 함께 설지가 밍밍을 탄채로 행렬을 선도하고 있었으며 설지의 좌우 곁에는 장포두와 왕포쾌가 말을 타고 호위하는 형태로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무당 십이검이 조용한 기세로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행렬이 산을 거의 다 내려 왔을 때였다. 앞서 나가던 설지가 갑자기 깃발을 좌우로 흔들며 행렬을 멈춰 세우더니 무언가를 뚤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지가 바라 보는 앞쪽에는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져 나온 듯 한 신발 한짝이 딩굴고 있었는데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린 아이가 신었던 신발 같았다. 무심코 지나쳤으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그 신발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던 설지가 호아를 바라보자 호아는 이내 산 비탈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설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운학은 호아가 산비탈 위 숲속으로 사라져 가자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지야! 무슨 일이냐?"
"응, 응, 숙부, 저거 좀 봐봐, 여자 아이 신발 같은데 사람 뼈로 보이는 뼈가 신발 속에 있어."
"그래? 이 숙부가 살펴보마."

나운학이 마차에서 내려 신발을 살펴 보는 사이 숲속으로 사라졌던 호아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나타났다. 그건 또 다른 신발 한짝이었다. 그제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하게 된 장포두가 설지의 곁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
" 마마! 저희 상직현에서는 그간 열살을 갓 넘긴 십이삼세 가량의 어린 여아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은채 여아들이 소리 소문없이 실종되어 버렸기에 사건의 해결이 난망하기만 했습니다."
"응, 응! 그랬구나. 숙부 어때요?"
"흠, 아무래도 사람의 뼈가 맞는 것 같구나, 그것도 채 성장이 끝나지 어린 여아의 뼈가 맞는 것 같다."

나운학의 말이 끝나자 장포두는 왕포쾌에게 신발을 수습하고 호아를 따라 가서 나머지 유품과 시신을 수습하게 했다. 왕포쾌의 일 처리는 능수능란했다. 순식간에 모든 유품과 시신을 수습한 왕포쾌는 장포두와 설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마! 제가 수습한 시신은 백골이기는 하나 분명 어린 여아의 시신인 것 같습니다. 여아를 살해한 범인이 산비탈에 시신을 파묻었던가 봅니다. 며칠 전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시신을 묻었던 흙이 쓸려 나가며 신발이 여기 까지 흘러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왕포쾌의 말을 장포두가 이어 받았다.
"마마! 이제 단서가 생겼으니 추후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심려치마옵소서"
"응, 응! 알았어요. 숙부 이제 다시 출발해."
"그래. 그러자꾸나"

산중에서 휩쓸려 내려온 신발 한짝으로 잠시 멈추었던 행렬은 다시 상직현의 성문 입구에 위치한 넓은 벌판을 향해 나아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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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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