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학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장포를 벗어서 어린 소녀의 몸을 감싸 안으려는 순간 이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철무륵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도 어느 사이엔가 내려와 바닥에 누워 있는 소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잔뜩 찌푸러져 있어 소녀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대관절 어떤 놈이 이렇게 어린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게야?"
철무륵의 이 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소녀를 내려다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철무륵이 말을 하는 사이 나운학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서둘러 의가의 숙영지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설지가 나운학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객잔의 뒷 정리를 위해 남기로 한 장총관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도 모두 서둘러 의가의 숙영지로 향하는 나운학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일행의 제일 뒷쪽으로는 사룡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숙영지에 도착한 나운학은 따로 천막 하나를 비우게 하고는 정신을 잃은 채 자신의 품안에 안겨 있는 소녀를 천막 속의 침상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뒤 따라 들어온 설지가 침구 정리를 하는 사이 나운학은 소녀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에게 소녀의 상태를 짧게 설명해 주고는 약재를 챙겨 오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운학이 떠난 천막 안에는 교혜린과 설지,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만이 남아 침중한 표정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녀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를 내려다 보던 설지는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듯 작은 목소리로 초아를 불렀다.
"초아! 저 언니의 몸 속을 한번 살펴 봐."
설지가 이렇게 말하자 곧 바로 초아의 내밀한 기운이 소녀의 몸 속으로 조용히 스며 든 후 세맥 구석 구석 까지 빠짐없이 훑어 나가며 소녀의 내부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한편 소녀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은 성수의가의 소공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 내심 어리둥절해 했으나 자신의 딸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에 묵묵히 설지와 자신의 딸인 소청이를 눈물 젖은 눈으로 번갈아 바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중년 부인의 낌새를 눈치 챘는지 교혜린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중년 부인을 안심 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너무 걱정마세요. 지금 저 아이의 내부를...아! 저 아이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흑흑, 예. 아가씨 소청이 입니다. 진소청"
"소청이라..이름이 참 예쁘네요. 지금 설지가 소청이의 내부를 기감으로 살펴 보고 있다는 정도만 이해 하시고 별일 없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거예요."
"흑흑, 고, 고맙습니다. 아가씨"

교혜린이 따뜻한 말로 중년 부인을 위로 하는 사이에 초아를 통해서 소청이의 내부를 다 살펴 본 설지는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지가 생각에 잠겨들 무렵 밖으로 나갔던 나운학이 약재를 챙겨 들고 의원 하나와 함께 돌아 왔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나운학의 모습에 다시금 덜컥 급이 난 중년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애절한 표정으로 나운학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나운학이 가져 온 약재와 침을 꺼내 들고 막 소녀의 곁으로 다가드는 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설지의 입이 나운학을 향해 열렸다.
"숙부! 그 언니, 기혈이 여러 군데 막혀있고 사기가 몸 속에 침투해 있어. 막힌 혈도와 사기를 뽑아내야 할 것 같아."
"그래? 어디 보자."

설지의 말을 들은 나운학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불어 넣으며 소녀의 몸 속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나운학은 설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소녀의 이런 상태로는 치료가 된다해도 막힌 기혈과 사기로 인해 평생 동안 잔병을 달고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침중한 표정으로 소녀의 손목을 조용히 내려 놓은 나운학은 설지를 바라 보며 의견을 구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님을 설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만약 말이다."
"응! 응! 알아. 무슨 말인지, 근데 이 언니는 괜찮을 것 같아"

소녀의 어머니는 지금 두 사람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교혜린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아마도 지금 두 사람은 공청 석유를 이용한 치료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이리라. 공청 석유의 엄청난 공능이라면 충분히 소녀의 몸 속에 있는 사기를 제거하고 막힌 혈도를 모두 뚫어 무공을 익히기에 좋은 체질로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만약 소녀가 악독한 심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자칫하면 살성이 될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운학의 이런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운학은 공청 석유의 이용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지가 괜찮을거라고 이야기 하자 나운학은 공청 석유를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초아와 함께 소녀의 내부를 살펴 보았을 설지라면 소녀의 심성도 짐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괜찮을 것 같다니 이 숙부는 네 말을 믿으마. 그럼 그렇게 치료를 해보자꾸나."
"응! 응! 헤헤헤"

나운학이 오늘 내린 이 같은 결정으로 인해 후일 강호에서는 냉수무정 진소청이라는 이름으로 설지의 곁을 지키게 되는 절대 검객의 이름이 사해를 진동하게 된다. 아직은 먼 훗날이지만 말이다. 나운학은 설지의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 조용히 천막을 빠져 나와 공청 석유가 보관되어 있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어가는 나운학의 뒤를 설지가 빠른 걸음으로 쪼르르 따라 왔다. 앞서 가던 나운학이 설지의 기척에 뒤 돌아 보자 냉큼 숙부의 곁으로 다가 온 설지가 입을 열었다.

"숙부! 나도, 나도 공청 석유가 필요해. 헤헤"
"응? 네가? 어디에 쓸려고?"
"응 쓸데가 다 있어. 그러니 걱정마, 걱정마."
"혹, 철숙부 드릴려고 그러니?"
"앗! 우와, 어떻게 알았어? 내 이마에 쓰여져 있나."

말을 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설지를 내려다 보며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나운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지의 손을 잡고 마차로 향했다. 공청 석유가 있는 마차 주위로는 아무도 없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마차는 늘 삼엄한 경비 하에 놓여 있었다. 소림과 무당, 그리고 개방과 녹림에서 번갈아 가며 드러나지 않게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청 석유를 챙겨서 소청이 있는 천막으로 돌아온 나운학은 소청의 옷을 모두 벗기고 전신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누어 침술의 시전을 마친 나운학은 끝으로 가져온 공청 석유를 소청의 입속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소청의 전신이 진동하는 것 같더니 전신 모공을 통해 노폐물이 빠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운학의 곁에서는 설지가 초아의 힘을 빌어 소청의 내부에 침투한 사기를 모공 쪽으로 빠져 나오게 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진 정도가 경과하자 소청의 전신에서는 더 이상 노폐물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피부가 한꺼풀 벗겨지며 눈부시게 뽀얀 새살이 돋아 나오기 시작했다. 연이어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도 함께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탈태환골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듯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기사였다. 그것도 기사 중의 기사였다. 무림사 이래 내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녀가 탈태환골을 거쳤다는 이야기는 단 한번도 전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공청 석유의 공능도 있었지만 나운학의 침술과 초아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소청의 몸이 탈태환골을 거치며 안정을 찾아가자 초조한 마음으로 시술을 지켜 보던 소청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자 너무 놀라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시 반시진이 지나자 탈태환골의 과정이 모두 끝난 듯 소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눈부신 뽀얀 피부와 불그스레한 뺨으로 미루어 이제 소청은 며칠 동안 안정만 취한다면 건강에는 이상이 없을 듯 싶었다. 그런 소청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살펴 본 나운학은 시전했던 침을 모두 거두어 들인 후 조용히 이불을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년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따님의 외상은 모두 치료되었습니다. 며칠간 안정을 취한다면 활동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쾌차할 것 입니다. 단지 아이가 입었을 충격이 적지 않을테니 제 허락이 있기 전에는 여기에서 계속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고, 고맙습니다. 신의님. 저, 그런데 얼마나 있어야 할는지, 약값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하하. 치료비 때문에 걱정되십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따님이나 잘 챙기십시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헤헤헤, 아줌마. 이 언니 치료비는 공짜야. 공짜. 그러니 걱정마"

나운학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며 하는 설지의 말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듯 긴 한숨을 토해내는 중년 부인이었다. 교혜린은 그런 중년 부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걱정마시고 따님이나 잘 보살피세요. 어린 나이에 능욕을 당하고 거기다 심한 부상 까지 당해 사경을 헤매었으니 정신적인 충격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교혜린의 그 같은 말에 다시 눈물을 글썽이던 중년 부인은 소청의 곁에 털썩 주저 앉아 말없이 소청의머리를 자꾸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 보던 교혜린은 나직히 한숨을 토한 후 슬며시 천막에서 빠져 나왔다. 한편 나운학의 손을 잡고 소청이 있는 천막에서 빠져 나왔던 설지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철무륵을 발견하고는 큰 목소리로 철무륵을 불렀다.
"철숙부! 철숙부!"

설지가 손을 살랑대며 자신을 부르자 엽정 등과 함께 노닥거리던 철무륵은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설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 귀여운 설지가 그새 이 숙부가 보고 싶었던 게냐?"
"씨, 아냐! 잔말말고 따라와 봐"

툭 한소리 내뱉은 설지는 자신의 천막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뒤 따르던 철무륵이 무슨 일인가 싶어 설지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설지가 찻잔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 찻잔을 불쑥 내민채로..
"응? 이게 뭐냐? 아, 아니, 이건..."
"마셔, 마셔. 무지하게 몸에 좋은거 알지?. 철숙부니까 특별히 보령환 대신 주는거야. 빨리 마셔."

철무륵이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설지가 내민 찻잔에는 공청 석유가 찰랑거리며 담겨 있었다. 철무륵은 공청 석유와 함께 조제한 보령환이 자신에게도 주어질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듯 많은 양의 공청 석유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한편으로 설지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친 혈육과 같다고 생각하니 감격에 겨워 눈물 한방울을 자신도 모르게 찔끔 흘리고 말았다.

"어? 철숙부, 왜 울어?"
"응? 아, 아니다. 설지가 이 숙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런거야. 하하하"
"훗, 철숙부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난데"
"응? 크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까짓거 털 좀 난들 대수겠느냐. 크하하"

철무륵은 호탕한 웃음 소리를 터트린 후 설지에게서 공청 석유가 담긴 찻잔을 건네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이내 정좌하여 운기를 시작하는 철무륵을 보던 설지는 살며시 천막에서 빠져 나가 녹림 이십사절객으로 하여금 철무륵을 살펴보게 하고 백아를 안고 팔랑 거리며 숙영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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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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