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와 일성 도장 그리고 일성 도장에게 고삐가 붙들린 밍밍이 숙영지를 완전히 벗어나 멀어지자 그때 까지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백아와 호아도 좌우로 갈라져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엽정이 조용히 철무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총표파자! 그런데 우리 녹림은 따라가지 않습니까?"
엽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엽정의 위 아래를 힐끗 바라보던 철무륵의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 나왔다.
"쯧, 자네 동경 안보나?"
"예?"
"쯧쯧, 하긴 자네나 나나 오십보 백보인건 마찬가지구만. 설지 말대로 우린 누가 보더라도 단번에 산적임을 알수 있을걸세. 그렇지 않나? 그런 우리가 은잠해서 따라가 봐야 산적들이 여기 숨어 있소 하고 사방 팔방 알리는 꼴 밖에 더 되겠나?"
"그, 그렇군요. 하하"
"하하는 무슨, 설지 놈 말대로 우린 이마에 딱 산적이라고 쓰여져 있는 처지니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음세"
"하하하. 그렇게 하지요."

철무륵이 엽정과 함께 시답지 않은 농을 주고 받고 있을 무렵 설지와 일성 도장은 밍밍을 데리고 막 성문을 지나쳐 성내로 진입하고 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는 언제 따라 붙었는지 백아와 호아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 하더니 이내 넓은 관도 좌우로 지어진 집들의 지붕 위로 사뿐히 올라 갔다. 굳이 숨기고자 하지도 않았지만 설지와 일성 도장의 바로 뒤 좌우에서 지붕 위를 도도히 걸어가는 백아와 호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이제 부턴 사람들이 있을 때는 할아범이라고 부를테니 그렇게 아세요. 아셨죠?"
"클클, 그래, 그렇게 하거라. 그나저나 그냥 이렇게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는거냐?"
"응, 응! 지금 부터 시전 구경도 하고 객잔에 가서 맛난 것도 사먹고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 다닐거예요"
"호, 그래.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작전이로구나. 허허"
"그렇죠? 무지하게 멋진 작전이라니까요. 헤헤"
"허허, 녀석! 그런데 백아와 호아는 어디 있느냐?"

일성 도장이 백아와 호아의 모습을 찾으며 이렇게 물어 오자 설지가 뒷 쪽의 지붕 위를 눈으로 가리키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백아랑 호아는 저기 지붕 위에서 따라 오고 있어요."
"호! 그럼 비아는 하늘 위에서 우리를 따라 오고 있겠구나?"
"앗!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아셨어요? 응, 응?"
"허헛, 녀석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 놀라느냐? 백아와 호아가 저렇게 지붕 위 좌우에서 따라 오고 있으면 당연히 비아는 하늘 위에서 따라 오고 있겠지."
"헤헤. 그렇구나."

일성 도장과 말을 나누는 사이 시전으로 들어서게 된 설지는 그때 부터 온 시전이 들썩거리도록 수선을 피우며 시전 탐색에 나섰다.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 들러서는 연신 예쁘다는 감탄성을 토하며 장신구를 골랐고 포목점에 들러서는 고운 비단 옷감들을 몸에 둘러 보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몇군데의 가게에 들러서 호들갑을 떠는 사이 소문이 가리키던 진가장의 여식이 시전 구경에 나섰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빌려 빠르게 전파되었다.

오전내내 시전을 들쑤시고 다니던 설지는 점심 무렵이 되자 가까운 객잔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하고난 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설지의 모습은 영락없이 상직현을 구경 나온 사람 처럼 보였다. 일성 도장과 함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을 걷다가 근처의 사찰로 접어드는 산중 소로에 당도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설지가 눈을 반짝이며 일성 도장을 향해 나직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드디어 미끼를 물었나 봐요"
"허허,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이제 어떻게 할테냐?"
"현장에서 잡아야 하니까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봐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런데 저 놈 기세가 제법 흉악한게 아무래도 손을 쓸것 같지 않느냐?"
"헤헤. 설마 할아버지 정도 되는 분이 저 색마의 공격에 어떻게 되시겠어요?"
"허허허. 한대 정도는 맞아 주어야겠지. 너도 조심하거라."

일성 도장의 말에 설지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설지와 일성 도장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을 향할 때 부터 은밀히 따라 붙었던 사내 하나가 조금씩 걸음을 빨리 하여 두 사람의 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기척을 죽이며 따라 온다고 하고 있지만 일성 도장과 설지 뿐 아니라 주변에 은잠해 있는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에게 그 기척이 발각된지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상공에서 비행하고 있던 비아 까지 사내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조금 하강 하여 허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언뜻 보기에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산중 소로로 접어든 설지와 일성 도장이 한식경 정도 더 걸어 갔을 때였다. 은밀히 따르던 사내가 갑자기 기척을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설지와 일성 도장의 앞을 막아 섰다. 일성 도장은 짐짓 놀란 척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나타난 인영을 주시했다. 설지와 일성 도장을 막아선 사내는 이십대의 청년으로 하관이 좁고 양쪽 눈꼬리가 위를 향해 찢어져 전체적으로 음침한 인상을 가진 것이 척 보기에도 '나 색마요' 하고 나불거리고 다닐듯 한 모습이었다.

"헉! 뉘, 뉘시요? 뉘신데 갑자기 길을 막아서는게요?"

사내는 일성 도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설지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내심 만족한다는 듯한 징그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리더니 대뜸 설지를 향해 이렇게 물어왔다.
"흐흐, 네가 진가장의 여식이냐?"

사내의 질문을 받은 설지는 화들짝 놀란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는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를 흉내내어 입을 열었다.
"그, 그렇습니다. 소녀는 진가장의 청이라고 하옵니다만 뉘신지요?"
"크크크, 알것 없다. 너는 나와 같이 가 주어야겠다."

이렇게 말하며 사내가 설지를 향해 성큼 다가서려 하자 곁에서 보고 있던 일성 도장이 황급히 설지를 가로 막으며 사내를 제지했다. 자신의 걸음이 방해받자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사내가 갑자기 무방비 상태의 일성 도장을 향해 권을 내질렀다. 제법 많은 내력이 실린 탓인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사내의 권은 정확히 일성 도장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퍽!

가슴에 권을 맞은 일성 도장은 그 충격으로 무려 일장여 가까이 날아간 끝에 땅 바닥에 나뒹굴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설지가 막 나오지 않는 비명을 억지로 짜내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일성 도장에게 권을 날린 사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설지에게 다가 오더니 대뜸 아혈과 마혈을 짚어 버렸다. 순식간에 혈이 제압되어 버린 설지는 멀뚱히 눈동자만 굴리며 공포스러운 표정을 억지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 기대하거라. 극락을 보여주마"

이렇게 말한 사내는 설지를 옆구리에 끼고는 숲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사내가 뒤로 돌아서자 그때 까지 죽은 듯 누워 있던 일성 도장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일성 도장의 눈에 사내의 옆구리에 끼인 채 끌려 가면서도 작은 손바닥을 살랑 살랑 흔드는 설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사내에 의해 아혈과 마혈이 제압된 상태 임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다니...

"사숙조님 ! 괜찮으십니까?"
"허허, 그래 괜찮으니라."
'아미타불,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등장한 청진 도사와 혜명 대사였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일성 도장과 일행들은 서둘러 사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한편 설지를 옆구리에 끼고 깊은 숲속 까지 들어온 사내는 주변을 살피다 제법 평평한 곳을 골라 설지를 눕혀 놓았다. 그리고 설지를 향해 음심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흐흐흐, 내 오늘 네년에게 극락이 무엇인지, 황홀경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기대하거라."

말과 함께 설지의 볼을 쓰다듬던 사내가 설지의 옷을 찢어 발길 요량으로 앞섶을 잡아갈 때였다. 갑자기 허리 쪽이 뜨끔하는 듯 하더니 온 몸이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마혈이 제압당했을 때 와는 다른 현상이었다. 깜짝 놀란 사내가 눈동자를 대룩대룩 굴리며 당혹해 할때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설지가 갑자기 부스럭대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옷에 묻은 풀잎과 먼지들을 툭툭 털어낸 후 사나운 눈초리로 사내를 노려 보았다.

"이씨, 뭐? 극락, 황홀경... 으아아!"

뾰족한 음성을 내뱉은 상기된 표정의 설지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눈동자를 대룩대룩 굴리며 당혹해 하는 사내의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있던 사내의 입에서는 기이한 괴성이 터져 나오며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계속 신음을 흘리는 사내를 쏘아 보던 설지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밍밍! 어디있어? 빨리 와"

밍밍을 찾는 설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숲속의 두 군데서 불쑥 나타난 하얀 물체가 설지를 향해 날아 왔다. 숲 속에서 기척을 감추고 지켜 보고 있던 백아와 호아였다. 나타난 백아를 품에 안은 설지가 주변을 두리번 거릴 무렵 푸르릉 하는 당나귀 콧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밍밍이 잡목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리고 뒤 이어 일성 도장과 혜명 대사를 비롯한 일행들도 장내에 도착했다. 갑자기 수십명의 사람이 나타나자 고통의 신음을 흘리던 사내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쓰러진 상태에서 암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설지야! 괜찮은게냐?"
"응, 응! 도사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헤헤. 그리고 드디어 색마를 잡았어요. 우헤헤"
"아미타불! 수고하셨소이다. 소공녀"
"응, 응, 참! 밍밍 이리 와"

가까이 다가 온 밍밍의 등에 실려있던 밧줄 한다발을 끌어 내린 설지는 쓰러진 사내를 일으키고는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그런데 밧줄이 길었다. 아니 길어도 너무 길었다. 결국 설지의 손에 들린 밧줄 한다발은 사내의 목 위를 제외한 전신에 칭칭 감겨 버렸다. 그리고도 발목 어림에는 반장 정도의 밧줄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설지에 의해 밧줄 한다발을 온몸에 장착한 사내의 모습은 영락없는 누에 고치의 모습이었다. 설지의 황당한 포박 모습을 지켜 보던 혜명 대사와 일행들은 그제서야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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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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