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에 의해 밧줄 감기용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사내는 하관이 좁고 양쪽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 신경질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어 첫눈에 보기에도 그리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정확히는 많은 소녀들을 겁간하고 살해한 인면수심의 색마를 지켜 보던 혜명 대사의 입에서 결국 나직한 불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혜명 대사의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 보고 있던 설지는 허리를 숙여 자신이 묶어 놓은 사내의 발치에 삐져 나와 있는 반장 정도 길이의 밧줄 끝을 잡고 일어 서면서 앞으로 휙 잡아 당겼다. 그러자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묶여 있던 사내의 몸이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렇게 나무토막 처럼 쓰러진 사내의 입에서 곧이어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가 쓰러진 머리 쪽에 놓여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사내의 뒷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다.

설지가 사내를 끌고 갈 준비를 하는 동안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일성 도장이 그제서야 무언가 생각난 듯 손가락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지야! 이놈 혈도는 제압했느냐?"
"응, 응, 예. 도사 할아버지, 설지표 특제 점혈법으로 꽉 묶었어요"
"특제 점혈법?"
"응, 응, 그게 말이죠. 나랑 초아가 발명한건데 특제 점혈법으로 제압하면 숙부도 절대 못 풀어요. 헤헤"
"허! 정말이냐?"
"응, 응, 그렇다니까요. 전에 제가 철숙부를 시험삼아 점혈해 놓고 숙부에게 이야기 하고는 놀다 왔는데요. 음, 음, 큭큭큭, 제가 놀다 와서 보니까 철숙부가 한시진 넘게 점혈된 상태 그대로 있더라구요. 숙부도 도저히 풀지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헤헤"
"허허허"
"하하하"

설지의 엉뚱한 말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웃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철무륵이 점혈 당해서 한시진 넘게 끙끙거린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허허, 녀석 엉뚱하기는,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응, 응, 헤헤헤, 그만 가요."

말을 마친 설지가 손에 쥔 밧줄을 잡아 당기며 걸음을 옮기려 하자 청진 도사가 성큼 한걸음 나서더니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그 놈은 빈도가 끌고 가겠소이다."
"응? 아니, 아니예요. 내가 끌고갈거야. 헤헤."

청진의 제의를 거절한 설지가 밧줄을 잡아 당기며 걸음을 옮기자 일성 도장과 혜명 대사, 그리고 청진을 비롯한 세명의 무당 제자를 제외하고 장내에 몰려 들었던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은 숲속으로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숲속에서 완전히 벗어난 설지가 하산을 서두르기 위해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걷고 있던 백아와 호아, 그리고 밧줄에 묶인채 끌려 오고 있는 사내를 한번 살펴본 후 눈을 반짝이며 백아와 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아! 호아! 저기 탈래?"

설지가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누에 고치가 되어 누워 있는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 설지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면 항상 나타나기 마련인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설지가 가리킨 방향을 잠시 흘낏 바라 본 백아는 설지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냉큼 몸을 돌려 누에 고치가 된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내의 배 부분으로 짐작 되는 곳에 올라가더니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아를 뒤를 이어 호아도 사내의 가슴 부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설지는 이렇게 말한 후 산중 소로를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꼭 잡아!"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설지에게 끌려가는 사내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설지가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쉴틈 없이 뒷통수를 계속 가격하는 돌부리들의 공격과 이따금씩 호아의 앞발이 머리를 톡톡 건드릴 때의 충격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건장한 사내를 밧줄에 매달고 소로를 달려 내려가면서 절로 신이난 설지는 점차 속도를 빨리 하여 순식간에 산중 소로의 입구에 당도했다.

백아와 호아의 눈에 주위 경물이 휙휙 지나간다고 느껴질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왔지만 설지는 신기하게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설지와 거의 비슷하게 소로의 입구에 도착한 일행들과 함께 걸음을 옮긴 설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전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등장한 설지와 일행들의 모습은 곧 사람들을 이목을 끌었다. 특히 귀엽고 아름답게 생긴 소녀가 건장한 사내 하나를 누에 고치 처럼 밧줄에 매달고 끌고 가고 있었으니 이목을 끌지 않을래야 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에 고치 위에 두마리 흰 고양이를 태운 소녀와 그 소녀의 뒤를 따르는 일행들의 모습은 이내 시전 사람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은 시전 순시에 나서고 있던 관병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관병을 이끌고 있던 포쾌 왕팔은 소녀와 일행의 기이한 모습을 멀리서 잠시 지켜 보다 곧바로 설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추시오! 잠시 거기 멈추시오"

소녀 일행의 모습을 지켜보며 수근거리고 있던 시전 사람들은 포쾌의 커다란 외침 소리를 들으며 자뭇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관병과 소녀 일행의 모습을 지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흥미진진한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던 시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녀에게 다가 갔던 왕포쾌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니? 마마, 마마 아니십니까?"
"응, 응! 헤헤, 왕포쾌 아저씨네."
"예. 마마, 신 왕팔이옵니다. 그런데 이 놈은...엉? 이 자는"
"응? 아는 사람이예요?"
"예. 마마, 이 자는 은가장의 장남이옵니다."
"은가장?"

설지의 머리 속에 어제 있었던 은가장주와의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전장을 하고 있다는 그 은가장 말이죠?"
"예. 마마, 상직현에 은가장이라고는 그 곳 뿐입니다."

설지와 왕포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일성도장은 은가장이 거론되자 어제 청진 도사로 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잔뜩 인상을 굳히고 있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니까, 이 색마가 은가장의 장손이라는 이야기로군"
"예? 예. 은가장의 장손이긴 한데 색마란 말씀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성 도장의 입에서 색마란 말이 나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왕포쾌가 이렇게 질문하자 대답은 청진 도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무량수불! 빈도가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러니까..."
"아니. 그럼 이 놈이 여아들을 헤쳤던 그 범인이란 말씀이십니까?"
"무량수불! 범행 현장에서 소공녀께 제압당했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을테지요."

현장에서 제압당했다는 청진 도사의 말에 깜짝 놀란 왕포쾌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 놈이 마마를 해하려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응! 그러니까 아주 나쁜 사람이야."
"이런 미친 놈, 마마. 저는 곧 바로 장포두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놈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
"응? 아, 그건 일단 청청 언니에게 가서 범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 후에 어떻게 할지는 숙부랑 의논할거야"
"예. 잘 알겠습니다. 마마. 그럼 저는 일단 관청으로 돌아가서 장포두와 현령 어르신께 이 사실을 고하겠습니다."
"응, 응. 알았어요. 헤헤"

설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왕포쾌가 관병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가까이에서 이들의 말을 들었던 시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잡놈이 색마라고 하는군"
"아니, 저 놈은 은가장의 장자가 아닌가?"
"허, 저런 놈이 옆에 사는데도 까맣게 몰랐다니..."
"쳐 죽일 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지켜 보던 시전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욕설을 뒤로 한 채 설지는 백아와 호아를 태운 누에 고치를 끌고 숙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설지의 뒤로는 밍밍이 연신 한 눈을 팔며 따르고 있었고 설지의 머리 위 하늘에서는 비아가 허공을 선회하며 설지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상직현의 초여름 날 오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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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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