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에서 몇개의 장신구를 더 꺼내 살펴 본 도현령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런 후 보따리를 풀어 헤친 뒤 바닥에 잘 펴 놓고는 장포두의 도움을 받아서 장신구를 하나씩 가지런히 늘어 놓기 시작했다. 장포두의 손에서 도현령의 손으로 전해져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지는 장신구들은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였다. 대충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비환(팔찌)을 시작으로 이환(귀고리), 지환(반지), 수파(목걸이)등의 주패(패물)들이 차례대로 바닥에 놓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신구들 사이에는 허름해 보이는 옷고름 몇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을 잘라 묶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뭉치도 여러개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머리카락 뭉치들에도 이름과 나이를 적어 넣은 작은 죽편이 제각각 매달려 있었다. 도현령의 손을 거친 마지막 머리카락 뭉치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놓여졌을 때는 이미 수십여개나 되는 장신구들이 바닥에 놓여져 있던 상태였다.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바닥에 놓여진 장신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 본 도현령이 싸늘한 눈으로 혼절한 채 묶여 있는 은고유를 바라 보며 장포두에게 명을 내렸다.
"장포두! 저 놈을 깨우시게."
"예. 현령 나으리"

도현령의 명을 받은 장포두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조아린 후 은고유를 깨우기 위해 막 다가설 무렵 장포두 보다 한발 먼저 은고유의 면전에 작고 하얀 물체가 나타났다. 설지의 부탁대로 무지하게 세게 은고유의 머리 통을 갈겨 버렸던 바로 그 호아였다. 호아는 설지의 목을 움켜 잡았던 은고유에게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진해서 다시 한번 은고유의 머리 통을 후려 갈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후려치는 호아의 앞발에는 그리 많은 힘이 실리지 않은 듯 하였다. 

호아가 십여차례나 머리 통을 가격하고 나서야 혼절한 상태에서 느낀 심한 고통에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은고유가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은고유의 머리 통을 작은 앞발로 다시 한번 쥐어 박은 호아는 은고유를 한번 째려 봐준 후 당당한 걸음으로 설지의 곁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설지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 호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준 설지가 손바닥을 펼친 양손을 밑으로 내밀자 호아가 냉큼 뒷발로 몸을 일으키더니 설지의 양손에 작은 앞발을 부딪쳐 왔다.
"헤헤. 호아, 무지하게 잘했어"
 
혼절한 상태에서 머리에 강하게 와 닿은 충격으로 인해 깨어났던 은고유가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가닥 기대를 안고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포승줄에 결박당한 자신의 몸 속에는 어떠한 진기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역혈마공으로 잠시 되살렸던 진기도 이미 나운학에 의해서 모두 소진되어 버린 상태였으며 단전도 폐쇄되어 더 이상 무인으로써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자 은고유는 심한 허탈감이 밀려 들었다.

그렇게 은고유가 심한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싸늘한 외침이 은고유의 귀를 자극했다.
"네 이놈!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질렀더란 말이냐?"

도현령의 싸늘한 외침에 일시지간 허탈했던 마음을 되돌린 은고유가 다시 무어라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서 어떤 물건 하나가 달랑 거리며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서 아른 거리며 흔들리는 그 물건을 은고유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음욕을 채운 후 살해했던 여아의 장신구를 기념품 삼아 가지고 와서 세필로 여아의 이름과 나이를 손수 적어 넣었던 작은 죽편이 달려 있는 그 물건의 정체를 몰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문갑 속에 있어야 할 작은 지환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은고유는 자신의 문갑에 보관하고 있던 지환이 자신의 눈앞에서 장포두의 손에 들린 채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하고 싶었던 말을 억지로 끌꺽 삼키며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때 다시 한번 싸늘한 외침이 은고유의 귀를 강타했다.
"네 이 놈! 이렇게 증좌가 눈 앞에 있거늘 어디 다시 한번 그 더러운 입을 떼 보거라"

이미 모든 사실이 증명된 이상 은고유에게 더 이상의 변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떠올렸던 은고유는 이내 나운학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모든 원망을 담아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놈! 의원이라는 놈이 무인의 단전을 폐쇄하다니 그러고도 네 놈이 무사할 성 싶더냐?"

그렇게 나운학을 향한 악담을 퍼붓고 있던 은고유는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희끗한 물체 하나가 나타나자 당혹한 음성을 터트리려 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 은고유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처절한 비명성이었다.

원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운학을 향해 악담을 퍼붓던 은고유의 눈 앞에 등장한 것은 백아였다. 그렇지 않아도 설지를 공격했던 은고유를 응징하기 위해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백아에게 은고유의 나운학을 향한 향한 악담은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은고유의 눈앞에 나타난 백아는 호아가 그랬던 것 처럼 작은 앞발로 은고유의 머리 통을 후려 갈겼다.
"으아악"

백아의 앞발 공격을 받은 은고유는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을 몇차례 더 터트리더니 끝내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혼절한 은고유를 향해서 다시 백아의 앞발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려 십여차례의 앞발 공격을 더 당한 은고유는 밀려오는 고통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신을 차리는 듯한 은고유의 머리 통을 한번 더 쥐어 박은 백아가 설지의 곁으로 위풍당당하고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와서 올려다 보자 설지가 다시 양손을 내밀어 백아의 앞발과 부딪쳤다.
"헤헤. 백아도 무지하게 잘했어."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철무륵은 나운학을 바라보며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아우, 저놈 아무래도 머리 속이 완전히 뒤집혔을 것 같지 않나?"
"흠, 제법 아프겠군요."
"크하하하. 제법 아프겠다라. 크하하, 그래, 그래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으이. 제법 아프겠구먼 그래. 크하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완전히 정신을 차린 은고유가 자신을 공격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릴 무렵 도현령의 입에서 다시 싸늘한 명이 장포두를 향해 내려졌다.

"장포두! 증좌를 다시 회수하여 갈무리 하고 저 놈을 관아로 압송하시게. 마마를 공격한 대역죄인이니 감시를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될 것이야."
"예. 현령 나으리. 심려 놓으십시오."
"마마. 신, 도일 저 색마를 관아로 압송하여 여죄를 추궁하고자 하옵니다. 달리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응, 응. 없어요. 없어! 아 참! 저기 청청 언니도 저 아저씨가 범인이라고 지목했어요."
"예. 마마. 잘 알겠사옵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서 죄인의 여죄를 추궁한 후 다시 찾아 뵙겠사옵니다."
"응, 응! 그렇게 히세요"

장포두가 관병들과 함께 은고유를 압송해 가고 그 뒤를 따라서 도현령이 사라져 가자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서 있던 철무륵이 설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설지야!"
"응, 응?"
"뭐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으악! 안돼, 깨물면 아프단 말이야"
기겁하는 설지를 향해 알밤을 한대 먹인 철무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녀석! 그게 아니고 너 말이다. 혹시 색마 놈이 은가장의 장손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더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허, 이 놈아 그렇지 않느냐. 시전에서 은가장주와 얼굴을 붉힌 그날 갑자기 색마를 잡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 그거. 아니 몰랐어. 그런데 은가장주라는 그 뚱보 아저씨를 보고 나서 몹시 기분이 나빴는데 갑자기 색마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야. 그래서 그랬던 거야"
"허! 설지 네 놈에게 이 도사 할애비 보다 더한 신통력이 생겼나 보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일성 도장이 이렇게 말하며 끼어들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설지가 혀를 쏙 내밀며 귀여운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 그런가. 가만 그러고 보니... 우와! 신통력이 생겼으면 부적그려서 팔면 떼돈 벌거 아냐? 그렇죠, 할아버지"
"허허, 그래, 그렇겠구나."
"헤헤헤"
"크하하"
"하하하"

설지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 소리가 흘러 나와 성수의가의 숙영지를 감돌았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질 무렵 설지는 백아를 품에 안고 곁에 있던 진소청의 손을 잡아 끌었다.
"청청 언니! 월병 먹으러 가자"
"예? 아, 예, 아가씨"

은고유를 보고 나서 교혜린의 품에 안겨 미망에 빠져 있었던 진소청은 설지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대답과 동시에 설지의 손에 이끌려 초혜의 할머니가 숙영지에서 당과와 월병을 만들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청청 언니! 이제 범인도 잡혔으니 내일 부터는 나랑 초혜랑 같이 놀아, 알았지?"
"예? 같이 논다는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진소청의 손을 잡아 끌며 월병을 찾아서 걸음을 옮기던 설지의 이야기에 진소청이 무슨 말이냐며 되묻자 다시 설지가 입을 열었다.
"아이 참! 노는게 노는거지, 뭐. 아! 다른 것도 있다. 진법도 배우고 무공도 배우고 그러면서 놀거야"
진소청은 설지의 진법도 배우고 무공도 배우고 논다는 말에 작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이제 부터 시작인 것이다. 다시는 힘이 없어 억울하게 죽음에 내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진소청의 가슴에 이런 다짐이 새겨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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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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