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찾아 온 성하는 호북성의 양양에도 어김없이 당도했다. 하지만 산정에 서면 멀리 양양성의 성루가 어렴풋 하게나마 보이는 복이산은 지금 성하의 무더위를 날려 버리기라도 하듯 굉음을 울리며 흘러 내리는 시원한 계곡 물 소리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마차 두대는 너끈히 지나쳐 갈 정도로 제법 넓게 닦여진 복이산을 관통하는 관도 아래 쪽에서 소리 내며 흐르고 있는 계곡 물은 여러 크기의 바위들을 만나서 잠시 한 숨 돌린 후 다시 맹렬하게 아래 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위들 중의 하나에는 작은 산새 한마리가 내려 앉아 더위에 지친 목을 시원한 계곡 물로 식히고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숲의 정경이었다. 하지만 그 한가로움은 곧 이어 들려오기 시작한 소음에 의해 깨어졌다. 작은 바위 위에서 목을 축이던 산새도 갑자기 관도 쪽에서 들려 온 시끄러운 소음에 화들짝 놀라서 작은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재빠르게 나무 위로 날아 올라 모습을 감추었다.

무사히 친구들이 있는 나무 위로 피신한 숲의 주인인 산새는 친구들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 산새들의 시선에는 막 복이산의 정상을 넘어서 하산하기 시작한 긴 마차 행렬이 보이고 있었다.
"헥헥! 우와, 더워, 더워, 더워..."

무더위와 싸워 가며 복이산을 막 넘어 온 긴 마차 행렬의 선두에는 특이하게도 당나귀를 탄 작은 소녀 하나가 연신 손 부채로 얼굴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었다. 당나귀를 탄 소녀의 바로 옆 허공에는 깃대 하나가 보이고 있었는데 그 깃대에 달려 있는 검은 색의 깃발에는 황금 색의 수실로 두마리의 용이 태극천을 감싸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깃발은 바로 성수의가를 상징하는 성수기였다. 그리고 그 성수기를 선두로 복이산을 하산하고 있는 행렬의 정체는 다름아닌 하남성을 목적지로 하고 있는 성수의가의 행렬이었다.

당연히 행렬의 선두에서 손 부채로 바람을 만들며 더워를 연발하고 있는 소녀는 설지였다. 한서 불침의 천잠사로 만든 장포도 이런 폭염에서는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연신 손 부채질을 하는가 하면 아래 쪽의 계곡을 살펴 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하는 설지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던 일성도장은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설지의 곁으로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몰아서 다가 갔다.

"허허, 이 놈아 더운게냐?"
"아! 할아버지! 응, 응, 무지하게 더워요. 이러다 나 시집도 못가보고 죽을거 같애, 으아악!"
"허허허, 그 놈 엄살은, 그러지 말고 심법이나 운용하거라. 그러면 한층 견디기 쉬워질게다."

일성도장이 혀를 끌끌차며 이렇게 이야기 하자 설지는 작은 고개를 살레 살레 저으며 더위에 늘어지듯 느릿하게 대답했다.
"귀 찮 아 요!"
"허허허"
"참, 할아버지! 양양성은 내일 쯤 당도할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래, 그럴 것 같구나. 이 같은 속도라면 내일 쯤엔 양양성에 당도할게다."
"우와! 신난다. 헤헤"
"녀석! 덥다면서 뭐가 그리 신나는게냐?"
"응? 아! 헤헤, 다른게 아니고 양양성에서 멋진 객잔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거잖아요"
"응? 허허허, 그래, 그러고보니 한동안 객잔 구경을 못해 봤구나"
"그렇죠? 헤헤, 맛난거 무지하게 먹어야지. 흐흐흐"

이렇게 설지와 일성 도장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성수의가의 행렬은 어느덧 복이산의 중턱을 지난 내리막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반시진 정도 더 하산한 성수의가의 행렬이 마침내 설지의 깃발 신호에 따라서 서서히 멈춰선 곳은 관도의 오른쪽 초지였다. 복이산에서 흘러 내린 계곡 물이 만든 작은 내가 시원하게 흐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주변이 탁 트인 넓은 초지에 행렬을 인도한 설지는 재빠르게 밍밍의 등에서 폴짝 뛰어 내리더니 막 멈춰선 어느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청청 언니! 초혜야! 빨리 나와, 빨리"

마차를 향해 달려 가는 설지의 입에서 이런 외침이 터져 나오자 막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소녀 두명의 머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진소청과 초혜였다. 설지가 자신들을 부르며 달려 오자 무슨 일인가 싶어 몸보다 머리를 먼저 내민 것이다.
"아이참! 뭐해. 빨리 내려. 물놀이, 물놀이 하러 가."

설지의 입에서 물놀이 라는 말이 나오자 초혜의 입에서 먼저 미소가 만들어졌고 뒤이어 진소청도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보는 진소청의 모습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고 이후 충격에 빠져 웃음을 잃어 버렸던 진소청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 것이 첫번째이며 두번째는 왠지 모를 화사한 분위기가 어린 진소청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지 언니! 물놀이 하는거야?"
마차에서 폴짝 뛰어 내린 초혜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채 귀여운 입을 열어 말했다.
"응, 응, 초혜야, 저기 보이지? 아까 산에서 부터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빨리 따라 와"
"응, 알았어, 언니."
"청청언니도 빨리 따라 와"
"예. 아가씨."

설지가 초혜와 진소청을 데리고 냇가 쪽으로 향하자 백아도 호아도 그 뒤를 따라서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 부터 세명의 소녀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물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백아와 호아, 그리고 용아도 오랜만에 만나는 시원한 계곡 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물 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며 망중한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얍! 장풍을 받아랏!"
"꺅! 설지 언니"

양손으로 물을 가득 퍼서 초혜에게 뿌리며 '장풍을 받아라'라고 외쳤던 설지는 이내 진소청과 초혜의 협공 장풍 공격에 맥없이 온 몸을 물에 흠뻑 적셔야 했다. 양 손을 놀려 장풍 공격에 대한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설지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항복을 선언한 후에야 진소청과 초혜의 장풍 공격이 끝이 났다. 한편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세 소녀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장풍 공격을 피해 한쪽 옆에서 백아, 용아와 함께 느긋하게 헤엄을 치고 있던 호아의 눈에 문득 이상한 돌 하나가 보였다.

호아가 왠지 모를 끌림에 그 돌을 자세히 보기 위해 물 속으로 잠수하여 살펴보니 그 돌의 정체는 빛깔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취였다. 하지만 제법 커다란 크기의 그 비취는 일반적인 옥돌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붉은 색의 기운을 띄고 있는 특이한 형태였다. 호아는 자신이 발견한 커다란 옥돌을 물고 가볍게 물 속에서 벗어나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물 위를 걸어 설지에게 다가갔다.

짤랑 짤랑한 교소를 터트리며 물 놀이에 빠져 있던 설지는 호아가 입에 커다란 돌 하나를 물고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엇인가 싶어 냉큼 다가가 호아의 입에서 뺏듯이 돌을 받아 들어서 살펴 보았다. 그렇게 옥돌을 살펴보던 설지의 눈이 금방 감탄의 빛으로 물들더니 입에서도 감탄성이 흘러 나왔다.
"우와! 이거 무지하게 예쁘다. 이게 뭐지? 청청 언니, 초혜야, 이 돌 좀 봐"

감탄을 터트리며 손에 든 옥돌을 초혜와 진소청에게 보여준 설지는 곧 물가에서 자신들을 지켜 보고 있던 청진 도사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옥돌을 건네주며 물었다.
"청진 아저씨! 이게  무슨 돌이예요?"

설지로 부터 옥돌을 받아 들고 잠시 살펴 보던 청진 도사는 옥돌이 가진 아름다운 빛깔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소공녀, 빈도가 보기에 이 옥돌은 아마도 비취 같소이다."
"비취? 아! 그 보석말하는거죠?"
"무량수불! 예. 그렇소이다"
"우와. 이리 줘 봐요"

청진의 손에서 다시 비취를 건네 받은 설지는 제법 큰 크기의 비취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올려 가며 크기를 가늠해 본 후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헤헤, 좋은 생각이 났어"
"무량수불, 무슨 좋..."

설지를 보며 말을 하던 청진 도사가 갑자기 말을 끊더니 세 소녀가 방금 전까지 물 놀이를 즐겼던 작은 내의 건너 편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부터 있었는지 십여명의 검은 색 무복 차림을 한 사내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십여명의 몸에서는 특이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청진 도사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강력한 경고성이 발해지자 지체없이 세 소녀의 앞으로 나서며 긴 휘파람을 불었다.  

청진 도사의 긴 휘파람은 사전에 약속된 경고 신호였다. 청진 도사의 입에서 긴 휘파람이 울려 퍼지자 가장 먼저 무당 도사들이 몸을 날렸으며 뒤 이어 소림사의 승려들도 청진 도사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렇게 긴박하게 움직이는 이쪽과는 달리 반대 편에 서 있는 십여명의 사내들은 미동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무심한 눈길로 이쪽을 지켜 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내들이 뿌리는 이상한 기운이 심상치 않았는지 설지가 재빨리 말 없이 서 있는 사내 중의 하나를 골라 기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설지의 입에서 갑자기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옆에 있는 초혜를 감싸 안으며 나운학을 커다랗게 불렀다.
"꺄악! 숙부, 숙부!"

설지의 긴박한 비명성이 터지자 안그래도 휘파람 소리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던 나운학이 순식간에 설지의 곁으로 다가와 설지와 초혜를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나운학의 뒤를 이어서 철무륵과 일성 도장, 그리고 혜명 대사도 심상치 않은 설지의 비명에 놀라 한걸음에 달려 와 설지의 곁에 내려 섰다.
"그래. 숙부다. 무슨 일이냐?"
"수, 숙부, 귀, 귀신이야."
"귀신?"
"응, 저기 건너 편에 있는 아저씨들 생기가 하나도 없어. 귀신이야. 귀신"

설지의 설명을 들은 나운학이 흠칫하며 건너 편에 늘어 서 있는 십여명을 재빠르게 훑어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일성 도장을 향해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아무래도 강시 같습니다"
"뭐라고? 강시, 방금 강시라고 했나?'
"예, 어르신"
"허허, 말로만 듣던 강시가 실제로 존재하다니..."
"응? 강시? 숙부, 강시가 뭐야?"
"음, 그건말이다. 이미 죽은 시체를 이용해서 특수한 대법으로 되살려 놓은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시체? 으아아, 귀신 맞잖아. 귀신"

설지가 다시 비명을 터트릴 때 묵묵히 늘어 서 있던 강시들이 내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설지가 귀신이라며 기겁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들이 강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을 십여구의 강시는 보여주고 있었다.

'창작 연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 연재] 성수의가 64  (0) 2012.03.17
[무협 연재] 성수의가 63  (0) 2012.03.04
[무협 연재] 성수의가 62  (0) 2012.02.26
[무협 연재] 성수의가 61  (0) 2012.02.19
[무협 연재] 성수의가 60  (0) 2012.02.12
[무협 연재] 성수의가 59  (0) 2012.02.05
Posted by 까만자전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