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개방 제자들의 모습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지켜 보고 있던 설지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주위를 둘러 보았다. 갑작스러운 강시들의 방문(?)에 놀라서 잠시 잊고 있었던 옥돌이 다시 생각난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옥돌의 행방을 찾고 있던 설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옥돌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이 찾고 있던 옥돌이 초혜의 작은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초혜로 부터 옥돌을 건네 받은 설지는 나운학에게 다가가 옥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숙부! 이 옥돌이 비취라는 보석이래. 무지하게 예쁜 돌이지? 이걸로 옥패 세개를 만들어 줘."
"옥패?"
"응, 응! 나랑, 청청 언니, 초혜, 이렇게 셋이서 하나씩 나눠 가질거야. 예쁘게 만들어 줘"
"그래?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줄까?"
"음, 음. 앞쪽에는 태극천의 모습을 새겨 주고 뒷쪽에는 성수의가라는 글자와 함께 일령, 이령, 삼령이라는 글자를 넣어 줘"
"일령, 이령 이라고?"
"응, 응. 누군가 우리 신분을 물어올 때 옥패를 척 내 보이며 <나 성수일령이오> 이렇게 말하면 신비하게 보이잖아. 헤헤"
"하하하. 성수일령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 알았다. 이 숙부가 아주 예쁘게 만들어 주마"

단순히 신비하게 보이는게 좋다는 이유만으로 설지가 장난스럽게 부탁한 옥패에 새겨질 성수일령, 성수이령, 성수삼령이라는 이름이 후일 강호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게 될지는 옥패를 만들어 달라고 했던 설지도 옥패를 만들어 주기로 한 나운학도 지금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귀여운 설지의 부탁에 장신구 하나를 만들어 준다는 생각에서 탄생하게 되는 성수령패는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개방의 제자들은 강시들을 조종했던 세 사람을 떠메고 복이산중으로 들어온 후 빠른 속도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집어 던지듯이 세 사람을 내려 놓았다. 개방 제자들의 뒷쪽에서 느긋하게 따라 왔던 취걸개는 개방 제자들에 의해 내팽겨쳐진 세 사람에게 곧바로 다가가 아혈을 먼저 제압한 후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몇군데의 혈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혈도를 제압당한 사람 부터 극도의 고통스런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연이어 세 사람 모두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혈을 제압당한 탓에 세 사람의 입에서는 비명 소리 대신에 쉭쉭 거리는 거친 숨소리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들 세 사람을 지켜 보고 있었더라면 고통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숨쉬기가 거북해서 그러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세 사람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채 일다경이 지나기도 전에 세 사람 중 하나가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해 버렸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혼절한 사내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한편 이들을 지켜 보고 있던 취걸개는 일다경도 지나기 전에 한 사람이 혼절해 버리자 고개를 갸우뚱 하며 혼절한 사내를 일으켜 앉힌 후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등 뒤의 명문혈을 통해 기를 흘려 넣어 주면서 사내의 내부 몸 상태를 살펴 보았다. 일각 정도의 시각이 흐른 후 명문혈에서 손을 뗀 취걸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혼절한 사내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허, 이런, 이제 보니 이 놈은 무인이 아니구만"

취걸개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개방의 제자 하나도 놀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분타주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인이 아니라니요?"
"쩝, 말 그대로다. 이 놈의 몸 속에는 내공이 한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랬다. 가장 먼저 혼절한 사내는 무인이 아니라 마혼령을 이용하여 강시들을 조종하는 술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까지도 고통을 견뎌내며 거친 숨소리를 발하고 있는 두 사람은 술사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호위 무사였다. 취걸개는 당연히 술사도 무공을 익힌 무인이겠거니 지레 짐작하고 혈도를 짚었던 것이었다. 개방에서 포로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수법은 바로 분근착골이었다.

어지간한 무인도 견디기 힘든 이 수법에 무인이 아닌 자가 당했으니 일다경을 버틴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취걸개에 의해서 명문혈을 통해 진기를 주입 받았던 혼절한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힙겹게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곧바로 인식한 사내는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화급히 입을 열었다.

"마, 말, 말하겠소.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

사내의 이 같은 말에 호위 무사 두 사람의 표정에서 언뜻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도 제압당해 있기는 매한가지라서 살기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곁에 있던 개방 제자의 주먹 세례를 넘치도록 받아야 했다. 분근착골에 이어 가혹하리 만치 급소만을 골라 패는 개방 제자들의 주먹 다짐 속에서 호위 무사 두 사람 역시 눈을 까뒤집으며 결국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자신들의 앞에서 무릅이 꿇린채 아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있는 술사의 말을 듣고 있는 취걸개와 개방 제자들의 표정은 침중하기 그지 없었다. 술사의 입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은 이러했다. 자신들은 혈교 소속이며 현재 혈교는 중원 정복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일련의 준비 과정 중에는 강시의 위력을 시험해 보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왕이면 강력한 집단을 상대로 강시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성수의가의 의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설지가 없었다면 혈교의 이러한 의도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설지라는 존재를 몰랐던 혈교의 선택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너무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고 간단하게 강시가 무력화 되어 버렸다는 것을 혈교의 수뇌부가 알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거기다 강시를 지탱했던 대법도 무적강시공이라는 이름으로 설지에게 넘어가 버렸으니 혈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통탄할 일이었다.

취걸개가 술사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혈교라는 이름과 강시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 정도 뿐이었다. 왜냐하면 혈교의 체제가 철저한 점조직의 형태를 띠면서 상부에서 내려온 지령을 하부에서는 무조건 수행하는 형태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술사가 알고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교라는 이름의 암운이 무림에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취걸개가 혈교의 무리들에게서 정보를 취합하고 있을 즈음 설지는 새로운 놀이가 될지도 모를 강시 만들기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산적떼의 한 사람씩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천천히 녹림이십사절객을 모두 살펴 본 설지는 가장 먼저 엽정에게 가부좌를 틀게 하고는 몇마디의 주의 사항을 알려 준 후 곧바로 강시 만들기에 들어 갔다.

노도와 같은 흐름으로 자신의 몸속을 관통하는 이질적인 기운에 처음에는 움찔했던 엽정이었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설지가 인도하는데로 자신의 진기를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엽정의 강시화는 설지 처럼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지의 인도에 따른 진기 순환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거의 반시진이라는 시각을 소비하고 나서였다.

그때 부터 엽정의 몸에서는 외부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뿌옇게 변해 버렸던 설지와 다른 점이라면 엽정의 몸에서는 거무튀튀한 색깔이 점차 짙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안절부절해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철무륵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수하이자 의제이기도 한 엽정이 행여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철무륵의 이런 우려는 설지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면 하등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점차 짙어지는 거무튀튀한 빛을 온 몸에 두르고 편안한 호흡을 하고 있던 엽정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그로 부터 일각 정도가 더 흐른 후 였다. 온 몸을 황동색으로 물들인 엽정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의 변화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때 엽정을 바라 보고 있던 설지는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엽정의 팔을 두들겨 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와! 성공이다.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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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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