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런 설지와 초혜의 뒤를 진소청이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한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소림사로 향하는 설지를 보고 잠시 당황해 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혜명 대사는 못말리겠다는 듯 이내 고개를 좌우를 저으며 곧 바로 공각을 불렀다.

 

"공각! 너는 지금 이 길로 급히 방장 사형께 달려가서 성수의가의 소공녀께서 본사를 방문하신다고 알려 드리거라."

 

이렇게 말하며 잠시 일성 도장을 바라 보았던 혜명 대사는 일성 도장의 고개짓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당의 일성자 어르신과 무당 십이검도 함께 방문한다고 알려드리거라."
"아미타불! 원주님,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소이다"

 

말을 한 이는 공각에게 지시하는 혜명 대사를 지켜 보던 철무륵이었다.


"철대협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래야 할 것 같소이다. 운학 아우가 자리를 비우기 힘들 것 같으니 내가 대신 설지를 따라가야겠구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공각! 사형께 철대협의 방문도 알려드리거라"
"아미타불!"

 

반장으로 대답을 대신한 공각이 빠르게 소림사가 있는 숭산으로 사라지는 목습을 지켜보던 혜명 대사는 서둘러 설지의 뒤를 따랐다. 나운학의 허락을 얻느라 잠시 지체했던 덕분에 몇걸음 앞서 있지 않던 설지를 금새 따라 잡은 혜명 대사는 설지의 한걸음 앞쪽에서 길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으며 설지의 뒤를 일성 도장과 철무륵이 따르는 형태로 일행은 소림사로 오르는 숲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파른 숲길을 따라서 한참을 올라가면서도 힘들지도 않는지 미소 띤 얼굴로 연방 초혜와 진소청에게 말을 건네는 설지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 친구들과 소풍을 나온 소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한참을 더 숲길을 오른 일행들의 눈에 멀리 소림사의 일주문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와! 드디어 소림사다. 초혜, 청청 언니, 준비 해"

초혜와 진소청을 보면서 설지가 이렇게 말하자 일행들은 무슨 말인가 싶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지만 일행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행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궁금함은 일주문을 지키는 지객승의 면전에 당도하자마자 어이없게도 너무 쉽게 풀려 버렸다.
"우와! 드디어 소림사로 들어간다. 초혜야. 청청 언니 옥패 꺼내"

 

설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세명의 소녀가 거의 동시에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옥패 하나씩을 꺼내든 후 지객승을 향해 척하니 내밀었던 것이다. 설지를 비롯한 세명의 소녀들 손에 들린 옥패는 바로 성수령패였다. 세상에 처음으로 설지의 장난스러움이 더해진 성수령패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패를 바라 보는 지객승인 기정은 그야말로 멀뚱한 표정으로 소녀들의 손에 들린 옥패와 계율 원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난처함을 간파한 혜명 대사가 나직한 불호와 함께 기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성수의가의 소공녀님과 일행 분들이시다. 그리고 그 옥패는 성수령패이니라. 방장 사형께는 내 따로 말씀드리겠지만 차후로도 그 옥패를 보이는 이가 있다면 본사의 귀빈으로 여기고 지체 없이 산문을 개방해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멀뚱한 표정으로 옥패를 바라보던 지객승은 혜명 대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반장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로써 성수령패의 권위를 소림사에서 가장 먼저 인정한 셈이 되었다. 지객승의 인도를 받으며 일주문을 넘은 일행들이 소림사의 대웅전에 당도하자 거기에는 눈 처럼 흰 수염을 가슴 까지 드리우고 역시 눈 처럼 흰 눈썹으로 눈을 거의 덮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고승 하나가 선두에 서서 일행을 조용히 맞이 했다.

 

"아미타불! 귀빈들의 소림사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이다. 빈승은 당대의 소림을 이끌고 있는 혜공이라 화외다"

"우와! 스님 할아버지, 꼭 신선 같으세요. 전 설지에요. 나설지! 헤헤"

"허허! 빈승이 제법 외모로는 한 무게 한답니다."
"헤헤!! 스님 할아버지, 정말 멋지세요."

 

설지의 웃음 소리와 감탄성을 들으며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지은 혜공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지의 뒤로 보이는 일성 도장을 향해 반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일성자 께서 이렇게 소림사를 방문해 주시니 소림의 제자들을 대신해서 이 땡초가 인사드립니다."
"무량수불! 방장께서는 그리 신경쓰시지 않아도 되오이다. 우리 무당은 지금 설지의 호위 무사 자격으로 따라 온 것이니 말이오"

"아미타불! 허허, 천하의 무당 십이검을 보표로 거느릴 분이 계실 것이라고는 빈승은 짐작조차 하지못했소이다."

 

일성 도장이 비록 소림사의 방장인 혜공 보다 한 배분이 높다고는 하나 혜공이 한 문파의 그것도 소림사를 대표하는 방장의 위치였기에 일성 도장의 입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진중하기 그지 없었다. 한편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한 듯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감상(?)하던 설지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방장 할아버지, 저기 산적 두목도 계세요"

설지의 산적 두목이라는 말에 잠시 흠칫했던 혜공 대사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철무륵을 향해 반장하며 인사를 대신했다. 설지의 장난스런 소개(?)로 약간 멀뚱해진 철무륵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으로 혜공 대사와 인사를 나눌 무렵 멀리서 은은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도합 다섯번의 범종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자 갑자기 설지의 안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방장 할아버지! 지금 저 종소리, 혹시 밥 시간이라고 치는 거 아니예요?"

"허허허! 그렇소이다. 소공녀. 점심 공양이 준비되었다는 타종이지요"

"우와. 밥, 밥 시간이다. 식당이 어디예요? 물론 공짜죠?"

"허허허! 물론 공짜 입니다. 빈승을 따라 오시지요."

 

초헤와 진소청을 양쪽에 대동하고 백아을 품에 안은 설지가 혜공 대사를 따라 총총 걸음을 옮기자 설지의 그런 모습을 늘상 봐 왔으면서도 새삼스레 실소를 터트린 일성 도장과 철무륵, 그리고 무당 십이검이 소림사의 승려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웅전을 돌아서 몇개의 전각을 지나치자 커다란 편액에 날아갈 듯한 필체로 와선당이라고 적어 넣은 전각이 일행을 반겼다. 설지의 목적지인 식당이 바로 이 와선당이었던 것이다.

 

"우와! 저 글자 무지하게 멋지다. 와 선 당, 우와, 이름도 무지 좋아, 초혜야 그렇지?"

 

설지의 감탄 그대로 편액에 적힌 글은 대단한 명문장가의 솜씨인 듯 일행들의 눈에도 결코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글이었다. 설지의 감탄성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혜공 대사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조금 큰 목소리로 편액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들려 주었다.

"아미타불! 저 편액은 소림의 2대조이신 혜가 선사 께서 직접 쓰신 것이지요. 허허"

 

혜공 대사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어딘지 모를 현기가 느껴지는 고승의 작품을 다시 한번 살펴 보기 시작했다. 눈 속에서 스스로의 팔을 잘라 법을 구하는 비원으로 달마의 제자가 된 이가 바로 혜가가 아니던가? 그런 고승이 직접 쓴 글이니 그 편액에서 현묘한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편액을 감상한 일행들이 다시 걸음을 옮겨 와선당으로 들어서자 이미 많은 소림사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준 두 줄로 길게 늘어선 탁자가 사람들의 시야를 가득 채워 왔다. 한번에 백명 정도는 느끈히 이용이 가능할 정도로 와선당의 내부는 몹시도 넓었다.

"우와! 무슨 스님들이 이렇게 많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큰 소리로 탄성을 토하는 설지의 목소리에 장내가 일순 조용해 지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시선이 설지에게 집중되었다. 난생 처음 자신의 기준으로 무지하게 많은 스님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된 설지는 잠시 어색한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오른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색함을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소림사의 승려들이 모두 시선을 한 곳에 모은 채 조용해 진 것은 설지 때문이 아니라 소림사의 방장인 혜공 대사와 계율 원주인 혜명 대사가 무당의 도사들과 함께 와선당에 들어 섰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와선당에 있던 승려들이 앞 다투어 방장에게 반장하며 인사를 하느라 와선당은 이내 시끌벅적한 소음에 묻혀 버렸다. 다행히 무지 하게 많은 승려들의 시선에서 놓여난 설지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 보며 빈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두 줄로 놓인 탁자들의 가운데 즈음에 제법 많은 빈자리가 있음을 발견한 설지는 초혜와 진소청을 이끌고 재빨리 빈자리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따라 온 철무륵과 일성 도장, 그리고 무당 십이검이 차례대로 자리를 잡은 후 마지막으로 혜공 대사와 혜명 대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잠시 후 젊은 승려 몇명이 음식을 날라 와서 일행들의 앞에 내려 놓기 시작했다. 사찰 답게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운 일행들이 식사 후 담소를 나누며 차 한잔을 마시기 시작할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무심코 차를 마시다 단청이 그려진 천장을 올려다 보던 설지가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어? 저게 뭐지?"

 

그렇게 의문을 터트린 설지가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자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설지와 천장을 번갈아 바라 보며 자신들의 눈에도 이상한 것이 보이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설지가 보여준 기이한 능력이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림사의 방장인 혜공 대사는 사제인 혜명 뿐 아니라 무당의 일성자와 무당 십이검의 이상한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공 대사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지와 천장을 번갈아 바라 보며 무언가를 찾는데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던 그 무언가가 갑자기 보일리 만무했다.

 

"우와! 신기해 신기해. 초혜야 저거 봐봐"

 

사람들이 무언가를 찾는데 실패한 직후 천장을 지켜 보던 설지가 초혜에게 천장에 그려진 단청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지의 말을 들은 혜공 대사가 무슨 말인가를 하며 설지의 행동을 말리려 할 때 였다. 자신의 곁에 앉아서 조용히 설지의 모습을 쫓고 있던 사제인 혜명이 자신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고개를 젓는 아닌가? 그런 혜명의 진중한 모습에서 나오려던 말을 입으로 꿀꺽 삼켜야 했던 혜공 대사는 사제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유곡절이라 생각하며 설지의 모습을 지켜 보기로 결정하였다.

 

"가만 여기가 와선당이지? 그럼 누우라는 이야기잖아. 청청 언니, 초혜야 누워, 누워"


이렇게 말한 설지가 냉큼 탁자 위에 드러 눕자 뒤를 이어 초혜와 진소청도 나란히 설지의 옆에 드러 누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아이들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누운 설지가 천장의 한 곳을 가리키며 진소청에게 동의를 구했다.


"청청 언니, 저것 봐. 저기 단청 무늬 중에서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 보이지? 그걸 백회혈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래로 보이는 다른 하얀 색의 단청들을 주욱 연결 시켜 봐"

 

설지의 설명을 들은 진소청이 설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단청을 기준으로 하얀 색의 단청들만을 살펴 보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묵묵히 천장을 바라 보고 있더니 잠시후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말씀대로 저 하얀 단청은 혈도를 표시해 놓은 것 같아요. 아마도 무슨 심공인 것 같네요."

진소청의 입에서 이런 말이 들리자 초혜가 그 말을 받았다.

 

"헤, 난 모르겠는데"
"초혜는 아직 혈도에 대해서 자세히 몰라서 그런거야"

 

한편 세명의 소녀들이 나란히 누워서 담소하듯 편안하게 나누는 말을 듣고 있던 혜공 대사는 경악한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그리고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래전에 실전된 심공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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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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