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에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시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쓰라는 듯한 설지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호아는 완강한 거부의 표시로 마치 배째라고 하듯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배를 드러내며 누워 버렸다. 하지만 그런 호아를 바라 보는 설지의 품에 안긴 백아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눈초리가 화살이 되어 호아를 향해 사정없이 날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아가 회랑을 가리키며 앞으로 라고 명령하듯 오른쪽 앞발을 앞으로 쭉 뻗어 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아는 드러누운 자리에서 일어 나야 했다.

백아의 눈치를 보며 느린 걸음으로 회랑으로 다가가는 호아에게서는 죽어도 하기 싫은데 라는 표정이 뒷통수에 나타나 있었다. 한번씩 설지와 백아를 힐끔거리며 느린 걸음을 옮겨 회랑의 입구에 선 호아는 다시 한번 설지를 바라보며 나 진짜로 들어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호아의 표정을 본 설지와 백아는 거의 동시에 오른 손과 오른쪽 앞발을 사이 좋게 흔들어 보이며 호아의 앞길을 축원해 주었다.

"호아! 회랑에 들어가면 내가 하라는 대로 그대로 해야 해, 알았지?"

설지의 말을 귀로 흘려 들으며 회랑에 입구에 서있던 호아는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만사 귀찮은 걸음걸이로 회랑을 향해 일보를 내딛었다. 그리고 호아가 세걸음 정도를 떼었을 때 설지의 입에서 오른손 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그러자 귀찮은 걸음을 옮기던 호아가 오른쪽 앞발을 척하니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른쪽 벽속에서 창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정확하게 호아가 앞발을 들고 있는 방향을 향해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후로도 오른손, 왼손, 양손, 오른발, 왼발, 폴짝 뛰어 등등의 실로 다양한 언어가 설지의 입에서 흘러 나와 호아의 귀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호아는 설지가 말한 손과 발을 휘둘러 자신을 공격해 오는 창과 도검 등을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호아의 그런 모습을 지켜 보던 혜공 대사와 혜명 대사는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지와 호아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부터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호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호아가 앞으로 나아가며 손과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분명 달마 대사가 용, 호랑이, 표범, 뱀, 학의 다섯 가지 동물들의 동작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소림오권 중에서 호권인 호권연골의 동작이었기 때문이었다. 팔과 허리를 중점적으로 단련시켜 뼈를 튼튼하게 하여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소림의 기본 무공이 지금 설지의 입과 호아의 동작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혜공 대사와 혜명 대사와 놀라움은 호아의 동작이 더해지면서 다른 소림사의 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소림사에 적을 둔 무승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배우고 익힌 소림오권이 자신들의 눈 앞 회랑에서 움직이고 있는 작은 호랑이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으니 그 놀라움이 작을수 없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소공녀께서 소림사의 밑천을 모두 챙겨 가려 하시는게로군, 허허허"

혜공 대사의 나직한 읊조림을 통해서도 소림사의 제자들은 설지의 입으로 전해지는 말과 호아의 동작이 분명한 소림오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허면 설지는 언제 소림오권을 배운 것일까? 장경각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드나들면서 익힌 것일까? 아니었다. 물론 장경각의 서가에서 소림오권이 적혀 있는 서적을 접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기에 대충 훑어만 보고는 도로 서가에 꽂아 넣었던 설지였다.

그런 설지가 지금 이렇게도 익숙하게 소림오권의 형을 입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초아의 도움을 받아 기감을 극대화 시켜 기관이 움직이는 과정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설지는 회랑 내부의 기관 장치가 호아를 공격하려 는 짧은 순간 미리 그 동작을 파악하여 호아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방비토록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 과정이 바로 소림오권 중의 호권의 형이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권의 형을 입으로 외치고 있는 설지의 말에 따라 호권연골의 투로를 밟아 나가던 호아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위와 아래 좌우를 번갈아 살펴 보다가 설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때 까지 자신이 헤쳐왔던 험란한 회랑의 통로와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미세하지만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호아! 왜 그래?"

갑작스러운 호아의 움직임에 호기심을 느낀 설지가 호아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이내 설지의 머리 속으로 호아의 심상이 전달되어 왔다. 설지와 호아는 미처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호아는 소림오권 중의 호권이 가진 형을 차례대로 한차례 다 펼친 상태였다. 그리고 호아가 서있는 바로 그 지점은 호권의 투로가 끝나는 지점이며 관문 하나가 끝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즉 호아의 지금 위치는 관문을 헤쳐 나오며 지쳤을 관문 도전자에게 숨 돌림 틈을 주는 휴식 공간인 동시에 운기를 통한 피로 회복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소공녀"

 

호아에게서 전해져 온 심상을 바탕으로 현재의 회랑 상황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설지는 자신을 부르는 혜공 대사의 음성에 비로소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려 헤공 대사를 바라 보았다. 그 순간 만사 귀찮았던 호아는 다시 회랑의 휴식 공간에서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배를 바닥에 깔고 널브러졌다.


"응? 아! 방장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허허, 아미타불, 소공녀,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아! 그게 말이죠. 호아가 걸어 갔던 통로와 지금 호아가 있는 곳의 분위기가 묘하게 다르다고 하네요"

"다르다? 어떻게 말입니까"
"응, 응, 그러니까 말이죠. 도검이 마구 튀어 나왔던 회랑의 통로에서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려는 듯한 기운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지금 호아가 있는 곳에서는 그런 기운이 전혀 없다고 해요.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고 하네요"
"허허, 그렇소이까? 혹시 소공녀께서 호아에게 일일이 설명해줬던 동작들이 소림오권의 호권이라는 것은 아시는지요?"
"예? 소림오권이라고요?
"허허, 역시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호아가 회랑을 걸어 가면서 도검을 튕겨 내었던 자세는 모두 호권의 투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라? 그럼..."

헤공 대사의 설명을 들은 설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양손을 마주쳐 소리를 내며 반색했다.

"그럼, 지금 이 회랑은 소림오권을 시험하는 일종의 관문이고 호아가 있는 곳은 일차 관문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이런 이야기죠?"
"아미타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야! 그럼... 아니지, 호아! 일어나서 돌아나와 봐."

설지의 밝은 목소리를 들은 호아가 육중한(?) 작은 몸을 힘겹게 일으키더니 애써 걸어 갔던 길을 어슬렁 어슬렁 힘없이 되돌아 나왔다. 호아가 돌아 나오는 순간 부터 다시 기감을 극대화 시켜 기관 장치를 살펴 보기 시작한 설지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환한 웃음으로 막 회랑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호아를 맞이했다.

"호아! 수고했어."
"아미타불! 아니 어떻게 된 것인지요. 기관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으니 혹시라도 기관이 모두 파괴된 것 입니까?"
"아니, 그건 아닐거예요. 공각 아저씨 어디있어요?"

난데없이 설지가 커다란 소리로 공각을 찾자 일행들로부터 조금 벗어난 곳에 머물고 있던 공각이 설지의 목소리에 이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모두가 천천히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공각의 걸음걸이는 보이는 것과 달리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것 같더니 이내 설지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놀라운 경신술이었다.

"아미타불! 소공녀, 부르셨는지요?"
"응, 응! 공각 아저씨, 저기 회랑으로 한번 들어가 보세요. 무적강시공을 운용하시고요"

설지의 주문을 들은 공각이 고개를 돌려 혜공 대사를 바라보자 혜공 대사의 고개가 아래 위로 끄덕여졌다. 혜공 대사로 부터 무언의 승락을 얻은 공각은 회랑의 입구로 걸어가 설지를 다시 한번 돌아 보았다. 무엇을 어찌하면 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알죠? 소림오권!"

설지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무적강시공으로 온몸을 찬란한 황금색으로 물들인 공각이 회랑으로 들어서며 소림오권 중의 호권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아가 회랑으로 들어 섰을 때 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 왔다. 회랑의 기관 장치와 소림오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듯 완벽한 호흡으로 공수를 교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절정에 이른 소림오권과 그런 소림오권의 투로에 맞추어 공격을 진행하는 기관장치의 절묘한 호흡은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춤사위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별달리 호흡이 거칠어 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짧은 시간 동안 호권의 투로를 모두 밟은 공각이 휴식 공간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 보다 걸음을 되돌리기 위해 돌아 섰다. 그런 공각의 귀로 설지의 당부하는 소리가 날아 들었다.

"돌아 나오실 때는 그냥 걸어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위험하면 알려드릴께요"

설지의 말 그대로 였다. 돌아서 걸어 나오는 공각에게로는 그 어떤 기관 장치의 공격도 이어지지 않았다. 설지의 강권에 의한 호아와 공각의 실험에 의해서 밝혀진 두가지는 이러했다. 첫번째는 소림오권 중의 호권의 투로에 따라 회랑의 통로를 나아가면 부상없이 일차 관문의 끝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일차 관문의 끝에서 돌아서 나올때는 기관 장치로 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만마관의 기관 장치는 소림사의 무공을 기반으로 설치되었으며 소림사의 무공을 완벽히 시전하는 이는 별다른 부상없이 관문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몇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무공이 어떤 순서로 기관에 대입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결 방법은 단 하나였다. 호아가 몸으로 떼우면서 하나씩 알아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혜공 대사와 헤명 대사는 이 순간 거의 동시에 하나의 생각을 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만마관을 잘만 이용하면 소림 제자들의 무공 성취 정도를 파악하고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관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로 소림삼십육방의 시작이었다. 허나 두 사람의 이런 기대에 찬 상념은 경내를 울리는 묵직한 종소리와 설지의 짤랑 짤랑한 교성에 의해서 산산히 부서져야 했다.

"우와! 밥! 밥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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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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