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설지가 와선당의 입구에서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자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던 초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며 설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설지 언니! 왜 그래?"
"응? 아! 그게... 이상해서..."
"응? 이상하다니 뭐가?"

"아미타불! 소공녀 무슨 일이신지요?"

설지의 바로 뒤를 따르고 있던 공각도 설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우고 초혜에게 이상하다고 이야기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한걸음 나섰다. 하지만 설지는 초혜와 공각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다시 입을 닫고 손목에 차고 있는 천마지존환만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마지존환이 고장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들여다 본 천마지존환에서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잿빛의 기운이 스며들어 천마지존환 본래의 색을 가리고 있었다. 천마지존환이 마기를 흡수 했을 때 일으켰던 반응과 똑 같은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 와선당 내부의 누군가가 마기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설지는 다시 한번 천마지존환의 변화를 살펴본 후 초아의 도움으로 기감을 확장하여 와선당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기의 원천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공각은 밥 먹을 생각으로 한껏 부풀어 있던 설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침중한 안색으로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천마지존환을 두어번 바라 보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재빠르게 전음을 날려 십팔나한들에게 와선당의 출입을 통제하게 하였다. 갑작스럽게 십팔나한들이 와선당의 출입을 막아 버리자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허! 이 무슨 일인가? 갑자기 와선당의 출입을 막다니?"


십팔나한들이 일언반구도 없이 갑작스럽게 와선당의 출입을 막는 모습을 보고 수근거리고 있던 승려들의 목소리를 뚫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열려진 와선당의 출입문에 와서 부딪혔다. 승려들이 커다란 목소리에 흠칫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부리 부리한 호목을 한 건장한 체격의 노승이 큰 걸음으로 성큼 성큼 와선당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아미타불! 제자 공각이 지객당주를 뵙습니다"
"흠, 자넨 공각이 아닌가? 그래 무슨 일로 이 늙은 중의 유일한 호사라 할 수 있는 공양을 막는겐가?"
"아미타불! 그것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얼굴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소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객당을 맡고 있는 이 노승이 바로 소림사의 방장인 혜공 대사의 둘째 사제 혜운이었다. 혜운 대사는 불같은 성정으로 툭하면 제자들을 패 버리는가 하면 소림사에 들른 외인들과도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바람에 소림사의 골치 아닌 골치가 된지 오래였다.

얼굴 생김새 만큼이나 폭급한 성정으로 늘 말썽을 일으키는 사제를 보다 못한 혜공 대사는 소림사를 찾아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지객당을 아예 사제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그 폭급한 성정을 고쳐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예의 그 폭급한 성정은 지객당을 맡으면서도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지객 업무에서도 제외되어 있는 이상한 지객당주가 바로 혜운 대사였다.

한편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 난처해 하는 공각을 힐끔 일별한 지객당주 혜운 대사는 여차하면 공각을 한대 패 버릴 심산으로 무슨 일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런 혜운 대사의 눈에 자그마한 여아 하나를 중심으로 세명의 여아들이 와선당의 입구에 나란히 서서 내부를 둘러 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 왔다. 그런데 가운데 서 있는 작은 여아의 모습이 기이했다. 분명 작고 갸날픈 여아임이 분명한데도 그 여아의 몸에서는 내력과는 다른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부리 부리한 호목을 한 혜운이 경탄성을 터트렸다.

"호오! 그 놈, 누구인지는 몰라도 선기를 지니고 있구만, 허허"

나직한 혜운 대사의 음성이었지만 이를 듣지 못할 공각이 아니었다. 혜운 대사의 입에서 흘러 나온 선기를 느꼈다는 말은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니었다. 선업을 쌓은 고승들이거나 절대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만이 현재 설지가 발하고 있는 기운을 미약하나마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혜운 대사를 바라 본 공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흠, 그러지, 뭐. 자고로 참을 인자가 세개면 살인도 면할 수 있다고 했느니.... 가만 이 말이 아닌가? 흠흠"


불쑥 엉뚱한 말을 내뱉는 혜운 대사의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가만히 웃음을 터트린 공각이 다시 설지를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설지가 허공 중에 이상한 손 동작을 떨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공각은 설지의 그 모습에서 예전에 이미 한번 보았던 장면을 다시 떠 올릴수 있었다. 철무륵을 향해 이상한 손 동작을 취하는 설지의 모습과 순식간에 점혈당한 듯 굳어 버린 철무륵의 모습 등이...

"아미타불! 소공녀, 무슨 일 입니까?"


공각이 예전의 장면을 떠올리며 와선당의 내부를 살펴 보자 세명의 승려들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채 당혹한 표정으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자연지기에 결박당한 상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움찔거리던 세명의 승려들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음을 확인하자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설지 쪽으로 시선을 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저는 뉘신데 우리를 이리 핍박하는게요?"

설지가 시전한 자연지기에 의해 결박당한 세 사람은 공각과 같은 항렬의 공자배 무승들이었다. 이들은 공양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내력을 뒤흔드는 이상한 기운에 흠칫 놀라 사방을 예의 주시하던 중이었다. 숨겨진 목적이 있어 오래전에 소림사의 제자가 되었던 세 사람은 마공을 익히고 있기는 했지만 그 마공의 기운을 내부 깊숙히 갈무리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랬기에 쉽사리 그 누구도 자신들이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짐작초자 하지 못하던 차에 갑자기 내부에 잠재워 둔 마기가 발동하자 깜짝 놀라 주변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 세 사람이 자신들의 마기를 뒤흔든 대상이 어린 여아의 손에 채워진 천마지존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헤헤. 미안해요. 스님들. 전 설지라고 해요. 음... 근데 왜 마공을 익히고 계시죠?"
"그, 그게 무슨 말이요? 마공이라니... 당치않소"

 

설지의 입에서 마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 충격은 대단했다. 와선당의 내부에 들어와 있던 승려들은 물론이고 공각과 혜운 대사 마저 경악한 표정으로 설지를 바라 보았던 것이다. 허나 설지는 그런 승려들의 경악한 모습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다시 결박당한 승려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헤, 거짓말해도 소용 없어요. 마공을 익히고 계신게 분명하니까요"
"아, 아미타불, 그런 억지가 어디있소? 증거도 없이 마공을 익혔다며 소림사의 제자를 이렇게 핍박하실 수 있는게요?"
"응? 증거? 증거를 보여드려요?"

설지가 세명의 승려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던 그 순간 조금 늦게 와선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던 혜공 대사와 혜명 대사. 그리고 철무륵과 일성 도장도 막 와선당에 당도하여 설지와 세명의 승려간의 설전을 지켜 보며 공각으로 부터 자조지종을 설명 받고 있었다. 공각의 이야기를 들으며 침중한 표정이 된 혜공 대사는 한걸음 나서서 설지의 곁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공녀, 저 세 사람이 마공을 익힌게 틀림없소이까?"
"아! 방장할아버지, 예. 틀림없어요."

짧게 말을 맺은 설지는 다시 소림의 혜광심어를 이용하여 혜공 대사만 들을 수 있게 말을 이었다. 한편 헤공 대사는 갑작스럽게 혜광심어가 머리 속을 울려 오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설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설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제가 막 와선당을 들어서려던 순간에 천마 할아버지의 비환이 부르르 진동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비환을 살펴 보니 조금이지만 마기를 받아 들이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기감을 넓혀 살펴 보니 저기 저 세 사람에게서 마공의 기운을 찾을 수 있었어요. 워낙 내력 깊숙히 마기를 꽁꽁 숨겨 두어서 비환이 없었더라면 저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거예요

설지가 짧게 말을 끊은 후 부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가는 혜공 대사의 모습을 바라 보던 혜운 대사는 두 사람 사이에 전음이 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설지가 전음이 아닌 소림사의 혜광심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짐작 조차 하지 못했다. 헤광심어는 일정한 내력이 없이는 시전이 불가능했으며 내력이 받쳐 주더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시전이 불가능한 소림사의 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지가 이미 소림사의 모든 무공을 장경각에서 탈탈 털어 갔다는 것을 알리 없는 혜운 대사였다.

설지의 긴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은 혜공 대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몹시도 조심스러운 혜공 대사의 모습을 바라 보며 한차례 침을 꼴깍 삼킨 혜운 대사가 벌컥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형! 왜 그러시오? 그리고 마공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폭급한 성정 만큼이나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혜운 대사의 질문을 손을 들어 먹아 버린 혜공 대사가 다시 설지를 향해 정중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공녀, 빈승은 죄송스럽게도 소림사의 제자들이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구려. 죄송하지만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증거를 보여주실 수 있으시겠소?"

무당과 녹림의 인물들이 보는 앞에서 마공을 익힌 제자의 증거를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이 몹시도 괴로운 혜공이었으나 정말 마공을 익히고 있다면 반드시 발본색원 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혜공 대사의 고심을 알았는지 설지는 귀여운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신이 자연지기로 결박해 놓은 세 사람의 반장 정도 앞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초아의 도움을 받아 세 사람의 내부를 뒤흔든 후 마기를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설지가 초아의 도움을 받아 세 사람의 내부로 침투시킨 기운은 천마지존환의 기운을 피하기 위해 내력 깊숙히 숨어버린 마기에 접근하여 순식간에 바깥으로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마기 역시 자연지기의 하나였기에 만년삼왕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년삼왕의 기운에 쫓겨 정체를 드러내었던 마기가 향한 곳은 전중혈 부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마기는 숨을 곳을 찾지 못했다. 단전에서는 여전히 만년삼왕의 기운이 무섭게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만년삼왕의 기운에 쫓겨 백회혈 쪽으로 향했던 마기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나야 했다. 이번에는 천마지존환이 강력한 영성을 일으켜 자신을 끌어 당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단전 깊숙히 숨어 있었던 마기는 만년삼왕의 기운에 쫓겨 전중혈을 거쳐 백회혈을 통해서 체외로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결박당한 세 사람의 백회혈에서 솟구쳐 오른 거무튀튀한 마기가 세 사람의 머리 위에서 한 차례 요동치는가 싶더니 이내 설지의 손목 쪽을 향해 날아가 순신간에 소멸해 버리는 것을... 물론 마기가 날아든 곳은 정확하게는 설지의 손목이 아니라 천마지존환이었지만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한편 순식간에 마공이 빠져 나가버리면서 허탈한 상태에 놓여 버린 세 사람의 승려 중 하나가 독기 오른 눈을 들어 설지를 향해 으르릉거렸다.

"이년! 이 씹어먹을 년, 네년이 이러고도 온전하기를 바라느냐?"

삽시간에 튀어나온 욕설에 한 순간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정적은 작은 소녀의 날카로운 소성과 어이없는 행동에 순식간에 무너져야 했다. 가만히 설지의 곁에 서 있던 초혜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저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인연이라고 했어요? 이년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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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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