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어깨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용아를 향해서 설지가 입을 열자 한차례 꿈틀하던 용아가 다시 조용히 날아 올랐다. 허나 설지의 어깨 위에서 조용히 날아오른 것과는 다르게 까마득한 절벽 위를 솟구치듯 날아 오르는 용아의 모습에서는 무거운 기세가 느껴졌다. 작고 앙증맞은 네개의 발과 머리 위에 달린 두개의 뿔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모습에서 용아가 작지만 분명히 전설상의 동물인 용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 설지 언니, 용아 봐봐, 대단해"
"그러게. 용아가 작심하고 날아 가는 것 같은데..."

그랬다. 용아는 설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적실영목의 위치를 파악했음과 동시에 적실영목의 주위에서 느껴지는 영수의 기파를 감지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 보다는 기파의 세기가 약하지만 적실영목의 뒷편 절벽 틈 사이에 은신해 있는 존재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영수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파였다. 용아의 기준에서 보자면 한입거리도 안되는 놈이었지만 행여나 멋모르고 반항이라도 해온다면 영수의 제왕인 용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이런 이유로 지금 용아는 무서운 기세를 발하며 곧바로 적실영목이 있는 곳을 향하여 솟구치듯 무서운 속도로 날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절벽 위를 날아 오른 용아는 순식간에 적실영목의 바로 앞에 당도하여 작은 눈을 무섭게 희번뜩이며 적실영목의 뒷편 절벽 틈 사이를 노려 보았다. 그렇게 잠시지간 절벽 틈 사이를 쏘아 보며 기파를 뿜어내자 아무것도 없는 듯 하던 절벽 틈 사이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기어 나와 적실영목의 곁으로 다가 왔다.

작고 하얀 색의 피부 색을 가진 그놈은 용아가 보기에 자신과 비슷한 외양을 갖추고 있는 아주 특이한 놈이었다. 순백색의 몸통과 그 몸통을 뚫고 나와 자리한 네개의 하얀 다리, 그리고 빨간 색을 띤 두개의 눈과 머리 위에 자리한 청록 빛 뿔 두 개가 마치 용의 모습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외양만 그럴 뿐 용아가 보기에 놈은 아직 용이 되기에는 너무도 미천한 존재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적안백린사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이 놈은 외양과는 달리 아직은 뱀이었다. 물론 영과나 영물을 복용하고 한 삼백년만 더 살아 남는다면 충분히 용이될 가능성이 있는 놈이기는 했다. 장난끼가 동한 용아가 가소롭다는 시선을 주며 적실영목 곁의 백사에게 자신의 기운을 힘껏 쏘아 보내자 갑자기 한차례 움찔하는 것 같던 적안백린사가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영수라고는 하나 아직은 애송이 정도에 불과한 적안백린사가 용의 기운을 이겨낼리 만무했다. 한편 용아가 장난삼아 적안백린사에게 겁을 주고 있을 무렵 절벽 아래 쪽의 설지는 초혜와 진소청의 도움을 받아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숲 속에 널린 부러진 나뭇가지와 돌, 그리고 이름모를 단단한 나무열매 등이 모두 진법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설지가 자신의 앞에 수북히 쌓인 각종 재료들을 이용해서 재빠른 손 놀림으로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하자 이내 조금씩 그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법으로 거두어진 자연지기가 마치 계단이 놓이듯 세 사람의 눈 앞에서 절벽 위를 향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다경 정도가 지날 무렵에는 이미 자연지기로 만든 계단이 거의 용아 근처에 까지 접근해 있었다. 가로 길이가 무려 이장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지기 계단이 한 계단씩 완성되어 가며 영롱한 빛을 뿌리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원각은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자연지기 계단을 가리키며 놀란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입속에서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원각 대신 다른 이의 음성이 곧장 들려 오며 원각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허허허! 아미타불! 사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느 틈에 따라 온 것인지 설지의 근처에 다가 온 혜공 대사가 사제인 혜명에게 묻는 말이었다. 설지가 진소청과 초혜를 데리고 적실영목을 찾아서 달음박질하는 모습을 산문에서 지켜 보고 있었던 혜공 대사와 혜명 대사는 일성 도장과 철무륵 등과 함께 설지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함께 걸음을 옮겼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 그들은 어느새 절벽 아래에 당도하여 설지가 만들어 가는 장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행들 중에서 자연지기 계단을 보고 가장 놀란 이는 불목하니 원각과 소림 방장 헤공이었다. 일전에 설지가 진법을 이용해서 자연지기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보았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두 사람은 설지가 진법을 직접 설치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 놀라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의문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혜명 대사가 자연지기 계단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아마도 소공녀께서 직접 창안하신 진법일겁니다"
"직접 만들었다고? 허허, 도대체 어느 분에게서 사사를 받았기에 저런 기이한 진법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허허, 사형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응? 나도 잘 아는 분이라고? 누군가. 혹여 제갈 세가의 전전대 가주이신 제갈 청, 그 어르신인가?"

"허허, 제갈 청이라...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 분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구신가? 어서 이야기 해보시게. 이 늙은 사형 숨 넘어가겠네"
"허허허, 소림사의 방장 께서 이만한 일로 숨넘어 가시면 안되니 말씀드리지요. 천기자 어르신 입니다."
"응? 천기자? 천기자가 누군가? 가만... 혹시 오백년전에 기문진법으로 위명을 날렸던 천기자 어르신을 말하는겐가?"
"허허, 예. 사형. 바로 그 분이십니다."
"응? 그 분이 맞다고? 그럼 말이 안되지 않는가? 소공녀께서 어떻게 오백년전의 인물에게서 사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허허, 그 분이 남기신 기문진법 총람을 기억하십니까?"
"기문진법 총람이라면 시중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서책이 아닌가?"
"예. 소공녀의 진법은 바로 그 서책에서 얻은 심득으로 만들어진 것 입니다."
"호오! 그래? 허허허, 아미타불, 시중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진법서에서 저런 심득을 얻는다라...허허허"

왠지모를 허탈함이 묻어 나오는 혜공 대사의 웃음 소리가 절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실려 조용히 사라져 갈 즈음 설지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자연지기 계단은 어느 사이엔가 적실 영목의 바로 근처에 까지 도달해 있었다. 용아는 자신의 발 아래 까지 자연지기 계단이 당도하자 조용히 자연지기 계단에 내려 서며 적안백린사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적안백린사 역시 조용히 적실영목에게서 떨어져 말 잘듣는 강아지 처럼 용아의 옆으로 내려 섰다.


"우와! 설지 언니! 완성이야, 완성!"
"헤헤. 다 됐어?"
"응, 저기 봐봐, 용아가 있는 곳 까지 계단이 완성되었어"

"그럼, 이제 올라가 볼까?"

양손을 부딪쳐 진법을 설치하면서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설지는 초혜와 진소청을 돌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둘 사이에 퍼질러져 있는 호아를 향해서 한 말이었다.
"이상없는지 먼저 올라가 봐, 부탁해!"

또 다시 귀찮은 일을 맡았다는 듯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린 호아는 설지가 만들어 놓은 까마득한 계단을 올려 보며 한숨을 한번 폭 내쉰후 첫번째 계단을 향해 발을 떼었다. 그리고 계단에 올라선 호아가 용아의 곁으로 다가 가는데는 촌각이라는 시각 밖에 걸리지 않았다. 첫번째 계단에 발을 올리는 듯 싶던 호아의 모습이 어느 사이엔가 용아의 곁에 나타난 것이다. 쏜살 같이 계단을 질주하는 호아를 지켜 보고 있던 설지는 만족한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자신도 계단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설지의 뒤를 이어서 진소청과 초혜 마저 계단을 걸어 올라 가기 시작하자 지켜 보는 이들은 혹시라도 계단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 잔뜩 긴장한 채 세 소녀를 지켜 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자연지기 계단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소녀들을 받아서 안전하게 내려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켜 보는 이들의 이런 걱정과는 반대로 자연지기 계단을 오르는 세 소녀는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서서 적실영목의 근처로 다가 선 설지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작고 하얀 색을 띤 적안백린사였다. 용아의 곁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잔뜩 움츠린 채 있는 적안백린사의 모습을 처음 본 설지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적안백린사의 외양이 용아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적안백린사의 곁에 바짝 다가가 앉은 설지가 손을 뻗어 적안백린사를 만지려 하자 그때 까지 얌전히 있던 적안백린사가 갑자기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며 설지의 손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적안백린사의 시도는 용아의 앞발에 의해 순식간에 제지되었다. 막 설지를 공격하려던 적안백린사의 머리가 용아의 오른쪽 앞발에 밟혀 버린 것이다. 꼴 사납게 머리를 밟힌 적안백린사가 꼬리를 요동치며 허우적 거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설지가 청아한 웃음을 터트렸다.

 

"꺄르르! 아유 귀여워, 용아, 그만 놓아 줘"

설지의 말이 있고서야 밟혀 있던 용아의 앞발에서 풀려난 적안백린사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용의 모습이 자뭇 신기한지 작은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더니 이내 얌전히 자리를 잡고 설지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 적안백린사의 눈에 보이는 설지는 한점 티없이 참으로 깨끗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영수의 제왕인 용이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적안백린사였다. 한편 설지는 자신을 바라 보는 적안백린사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손을 적안백린사에게 가져갔다. 흉성을 드러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적안백린사가 설지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헤헤, 너 무척 귀엽다. 피부도 곱고, 어때? 청청 언니가 보기에는?"

"예. 아가씨 말씀처럼 무척 귀엽게 생긴 놈이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용처럼 보이는데 아닌가요?"

"응, 응! 용은 아닌가 봐. 용아 말을 들어 보니 뱀이라고 하는데 생긴걸로 봐서는 그냥 뱀은 아닌 것 같아"

적안백린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설지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눈 높이에 적안백린사를 오도록 한 후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때? 너 우리랑 같이 갈래? 우리랑 가면 무지하게 재미있을건데...어때?"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을 설지로 부터 받은 적안백린사는 잠시 용아와 호아를 내려다 본 후 설지의 품에 안긴 백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과 근처에서 지루한 생을 살아가는 것 보다 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와! 승락한거야? 좋아, 그럼 먼저 이름이 있어야 하니까... 설아! 그래 설아가 좋겠다. 어때 설아?"

설지의 신들린 작명 법에 의해 또 다시 너무도 단순한 이름 하나가 영수에게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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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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