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하얀 색의 피부를 가졌다고 해서 설아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적안백린사는 그래도 좋았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친근한 이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자신 보다 더 오래도록 살아 왔고 영성도 비교 조차 되지 않으며 심지어 호풍환우 까지 마음대로 부리는 영수의 제왕인 용의 이름을 용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자신의 이름이 사아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적안백린사는 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아라는 이름에 만족한다는 동작이었다.

"헤헤, 좋았어! 그럼 오늘 부터 네 이름은 설아야. 설아! 자 다들 인사 해!"

설지가 이렇게 말하며 손바닥 위의 설아를 모두가 잘 볼 수 있게 손을 앞으로 내밀자 제일 먼저 호아가 앞발 하나를 척하니 들어 올리며 반갑다는 인사를 대신하였다. 이어서 설지의 품에 안겨 있던 백아도 앞발 하나를 척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였고 용아는 설지의 어깨 위로 날아 오르면서 한번 째려 봐 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렇게 영수들 사이의 인사가 끝나자 다음으로 진소청과 초혜가 다가와 적안백린사를 들여다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난 초혜야! 초혜" 
"난 진소창이야. 반가워"
"설지 언니! 설아 만져 봐도 돼?"
"응, 응! 만져 봐, 무지하게 부드러워. 헤헤"


설지의 손바닥 위에서 자신의 손바닥 위로 설아를 옮겨온 초혜는 눈을 반짝이며 나름대로는 영수인 적안백린사를 세세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가끔 가다 몸통 여기 저기를 작은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며 신기해 하는 초혜의 모습을 바라 보던 설지는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지의 시선이 가닿는 창공에선 비아가 느린 속도로 선회하고 있었다.

 

"비아! 이리 내려와서 설아랑 인사해!"

별다른 생각 없이 설지의 모습을 쫓으며 창공을 선회하고 있던 비아는 설지가 자신을 부르자 빠른 속도로 비스듬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가히 쏜살 같은 속도였다. 순식간에 설지의 머리 바로 위 삼장 정도 까지 접근한 비아는 날개를 활짝 펼쳐서 낙하하는 속도를 줄이더니 가볍게 설지의 발치께로 내려 앉았다. 그리고 뒤뚱 거리는 걸음으로 설지를 향해 다가 갔다.

"비아! 인사해. 오늘 부터 우리랑 함께 살게 된 설아야"

설지가 초혜의 손바닥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설아를 가리키며 이렇게 이야기 하자 비아는 작은 눈을 또르르 굴리며 설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하얀 색을 가진 뱀이 무척 맛있겠다는 생각을 비아가 머리 속에서 떠올릴 무렵이었다. 갑자기 초혜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있던 설아가 날카로운 소성을 뱉으며 비아를 향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맛있겠다는 생각만을 하며 멍하니 설아를 바라 보고 있던 비아가 화들짝 놀라서 날개를 퍼덕이며 황급히 뒤로 몇걸음 물러 났다.

 

"어라? 설아, 왜 그래?"

초혜 역시 갑자기 돌변한 설아의 행동에 깜짝 놀라서 하마트면 손바닥 위의 설아를 바닥에 떨어뜨릴뻔 하자 황급히 양손을 오므려 설아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한편 설아와 비아의 첫대면을 지켜 보면서 머리 속으로는 앞으로 설아를 어디서 지내게 할까 하는 생각에 몰두해 있던 설지는 갑자기 설아가 흉성을 드러내자 무슨 일인가 싶어 설아와 비아를 바라 보았다가 피식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비아! 너, 설아를 보면서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지?"

"아하! 그런거야. 갑자기 설아가 고함(?)을 쉭하고 질러서 깜짝 놀랬어"
"비아! 설아가 너 보다 나이도 많고 싸움도 훨씬 잘할 것 같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말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 알았지?"

설지의 당부를 들은 비아가 알아 들었다는 듯 다시 뒤뚱거리며 설지에게 다가와 부리를 다리에 부벼대기 시작하자 비아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 준 설지가 다시 설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설아는 앞으로 어디서 사는게 좋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한데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설지의 말을 들은 설아가 작은 머리를 갸우뚱 하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있자 손가락을 뻗어 설아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설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때? 여기서 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말하는 설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설지가 늘 메고 다니는 가방이었다. 설지가 보기에 설아의 크기나 주어진 여건 등을 고려할 때 최적의 장소가 바로 자신의 가방 속이었던 것이다. 그런 설지의 말을 들으며 설지가 메고 있는 가방을 바라 보던 설아도 하얀 색의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지 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너무 쉽게 승락해버린 설아는 설지의 가방 속으로 들어온 후 기함을 하며 한바탕 몸부림을 쳤다.


적안백린사인 설아는 원래 주변이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곳을 좋아하여 절벽 틈 같은 곳을 서식지로 하고 생활하는 영수였다. 그런 영수가 정리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혼돈 속의 가방 속에 들어 왔으니 기함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부터 설아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여기 저기 마음내키는 대로 처박혀 있는 각종 물품들을 때로는 입으로 물어 나르고 때로는 발로 뻥뻥 차면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아가 들어간 뒤 부터 가방 여기 저기가 불쑥 불쑥 튀어 나왔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 것은 그런 설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한편 설아를 혼돈의 가방 속에 넣어준 설지는 이제 본연의 목적인 영목을 채취하기 위하여 절벽 틈에 위태롭게 뿌리를 내리고 자리잡은 적실영목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앵두의 반 정도 되는 크기로 크기만 작을 뿐 거의 앵두와 흡사하게 생긴 빨간 열매 수십개가 조롱조롱 매달린 적실영목은 가까이서 보니 어른의 엄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잎사귀와 빨간 열매로 인해 대단히 수려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파른 절벽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적실영목의 전체 길이는 한자가 채 되지 않을 성 싶었다. 적실영목의 전체 길이와 절벽 틈으로 튼튼하게 자리 잡은 뿌리 등을 가늠해 볼때 분에 옮겨 심어도 별다른 무리는 없어 보였다. 이에 설지는 적실영목을 분에 옮겨 심고 가져 가기로 결정하고 절벽 아래 쪽을 내려다 보았다. 예상대로 철무륵을 포함한 일행들이 절벽 아래에서 자신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철숙부! 분 하나 가져다 줘!"
"뭐라고? 분이라고 했느냐?"

절벽을 쩌렁쩌렁 울리는 철무륵의 대답이 들려 오자 설지 역시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응! 분 하나 가져다 줘. 길이가 한자 정도 되는 나무를 옮겨 심을거야"
"그래.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잠시 후 공각이 딱 적당한 크기의 분 하나를 들고 경공을 발휘해 자연지기로 쌓아 올린 계단을 밟고 올라 왔다. 그리고 설지의 앞에 가져온 분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아미타불! 소공녀, 이 정도 크기면 될른지요?"
"응! 응! 딱 좋아요. 헤헤"

분을 이리 저리 돌려 보며 만족한 미소를 얼굴에 그린 설지는 분을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 놓고 적실영목을 채취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적실영목의 뿌리가 파고 든 절벽 틈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신중한 손 동작으로 뿌리 부근의 절벽을 조금씩 파헤치기 시작했다. 뿌리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설지의 손동작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설지의 손동작을 보며 공각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지가 파헤치고 있는 절벽은 단단한 암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암벽을 마치 부드러운 흙을 파헤치듯이 자연스럽게 파헤치는 설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보니 내심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공각 자신도 공력을 운용하면 암벽을 부수는 것 쯤이야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지 처럼 흙을 파헤치듯이 정교한 손놀림을 보이라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젖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공각의 경악을 뒤로 하고 적실영목의 뿌리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헤치던 설지가 마침내 적실영목을 살며시 잡고 조금씩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이내 적실영목의 뿌리가 절벽 틈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잔뿌리 하나라도 다칠새라 매우 조심스럽게 작업한 끝에 적실영목을 절벽에서 분리하는데 성공한 설지는 적실영목을 분 속에 가만히 내려 놓고 바닥에 떨어진 돌 조각과 절벽에서 뜯어낸 돌 조각들을 손으로 비벼 작은 모래로 만든 후 적실영목이 자리잡은 분 속으로 골고루 흘려 넣어 주었다. 서너번 더 같은 작업을 반복한 끝에 적실 영목의 뿌리가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들어준 설지는 완성된 적실영목 분을 보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혜아! 어때?"
"우와, 설지 언니, 이 나무 무지하게 예뻐"
"그렇지? 헤헤. 이제 내려가자. 숙부님께 보여드려야겠어"
"가주님께 가시려고요?"
"응! 응! 청청 언니, 공각 아저씨 분 부탁해요"
"아미타불! 그러시지요"

공각이 완성된 적실영목의 분을 조심스럽게 챙겨 들자 호아를 필두로 한 일행 모두가 자연지기 계단에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흡사 뜀박질 경쟁이라도 하는 듯 우당탕탕 뛰어 내려 오는 세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것은 철무륵이었다.

"저, 저..."

 

철무륵의 당혹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자연지기 계단을 모두 내려온 일행들은 쌩하고 철무륵의 곁을 지나치더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갔다.

 

"아이쿠! 이 녀석들아. 넘어지겠다. 천천히 가거라"

철무륵의 염려섞인 당부를 듣지 못한 듯 설지와 일행은 산문을 향해 달려 가는가 싶더니 이내 산 아래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려 가기 시작했다. 성수의가의 숙영지가 있는 등봉현으로 향하는 뜀박질이었다. 그런 일행들의 가장 뒷쪽에서는 원각이 허둥지둥 달려 가고 있었다.

 

'창작 연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 연재] 성수의가 84  (0) 2012.08.12
[무협 연재] 성수의가 83  (0) 2012.07.29
[무협 연재] 성수의가 81  (0) 2012.07.15
[무협 연재] 성수의가 80  (0) 2012.07.08
[무협 연재] 성수의가 79  (0) 2012.07.01
Posted by 까만자전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