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설지 언니, 저기 저 스님 좀 봐봐. 공각 스님 같은데..."
"응? 어디?"

초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준 설지는 낡았지만 정갈한 회색빛 가사를 걸치고 아홉개의 계인이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진 승려 몇사람이 태청관의 앞 마당에 조용히 서서 무인 복장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승려들 가운데 제일 앞에 서서 다른 승려들을 대표하는 듯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승려는 분명 설지가 잘 아는 공각 스님이었다. 그렇게 공각 스님을 발견한 설지는 반색하며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공각 스님을 외쳐 불렀다.

"스니임~ 공각 스님!"

한편 십팔나한의 수좌승인 공각은 무당에서 열리는 대회합에 참가하기 위해서 십팔나한 모두와 함께 천붕일권 혜명 대사를 수행하여 반시진 전에 무당파의 태청관에 도착한 후 미처 여장을 풀기도 전에 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구파일방의 다른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외쳐 부르는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 오자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런 공각의 눈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성숙한 세명의 여인들이 비쳐 들었다. 자신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세명의 여인들을 발견한 공각은 잠시 당혹한 표정을 떠올렸지만 이내 신색을 추스리고 삽시간에 자신의 삼면을 완벽히 포위해 버린 세명의 여인들을 향해 합장하며 불호를 발했다.

"아미타불! 세분 소저 께서는 빈승을 아시는지요?"
"호호. 반가워요. 공각 아저씨"
"헤헤. 공각 스님,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뉘신지... 가만, 공각 아저씨라... 그러고 보니... 허허허, 아미타불, 빈승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세분은 바로 성수신녀 일행이시군요."
"호호. 맞아요. 전 설지고, 여기 얼음 마녀는 청청 언니, 그리고 요 꼬맹이는 초혜예요."
"앗, 설지 언니, 나 꼬맹이 아냐!"
"아미타불, 반갑소이다. 세분 소저께서 눈부시게 아름다워지셔서 잠시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허허허"
"호호, 고마워요."
"그런데 세분 소저께서도 이번 구파일방의 회합에 참여하시는 것 입니까?"
"음, 뭐, 그런 셈이죠. 저흰 그냥 무당산에 놀러 왔다가 회합이 있다는 것을 전해들었지만요."
"아미타불! 그러셨군요. 하긴 이왕 오셨으니 많은 도움 기대하겠습니다."
"도움이랄 것 까지는 모르겠고 마화라는 건 꼭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설지가 자신의 팔목에 차고 있는 성수지환을 슬쩍 내보이자 그것을 발견한 공각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미타불! 그러고보니 그 비환에 숨겨진 묘용이 있었다는걸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호호호,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이 비환은 이제 성수지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아미타불! 그렇군요. 성수지환이라... 허허허, 좋은 이름입니다."
"호호호, 그렇죠. 그런데 혜아랑 청청 언니는 그 이름이 촌스럽다고 맨날 그래요"
"허허허, 아미타불"

한편 공각과 설지 일행이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고 있는 사이, 그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혜명 대사는 공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여 주위의 무당 제자 하나를 불러 세운 후 그 정체를 물었다가 성수신녀 일행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화급히 설지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성수신녀가 누구던가? 작금에 이르러 소림사의 무력을 대표하는 금강지체의 존재들인 소림 사대금강의 탄생을 견인했으며 절전되었던 심공인 반야보리항마심공을 와선당의 천장에서 발견하여 소림사에 돌려 주는 등의 기행으로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소림사에 가져다 준 소림 제일의 은인이 아니던가 말이다. 당연히 설지를 향해 다가 가는 혜명 대사의 발걸음은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성수신녀를 뵙소이다"
"응? 어라! 스님 할아버지, 우와, 정말 스님 할아버지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허허허, 오랜만에 뵙소이다. 그런데 빈승의 눈이 늙그막에 꽤나 호강을 하는 듯 싶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허허허, 신녀를 비롯해서 세분 소저 모두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지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난, 또... 호호호"
"대사님을 뵙습니다."
"혜명 대사님을 뵈어요"
"허허허, 저도 반갑소이다."

혜명 대사를 비롯한 소림사의 승려들과 어울려서 화기애애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설지 일행의 존재는 태청관에 모인 구파일방의 인물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특히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은 아름다운 세명의 여인들이 소림사의 계율 원주와 십팔나한들을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잔뜩 어린 시선으로 추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 후기지수들 가운데서 젊은 남자 후기지수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세명의 여인들을 향한 관심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저기 저 세분 소저가 어느 문파에서 오신 분들인줄 아시는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미모들이구먼. 서시가 울고 가겠어"
"흥, 대단하기는 뭐가 대단해요" 


그런 후기지수들 가운데서 이십대로 보이는 두명의 준수한 남자와 그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 하나가 한쪽에 모여 서서 이런 대화를 나누며 설지 일행을 지켜 보고 있었다. 두명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의 옷소매에는 작지만 화려한 매화 꽃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푸른 색의 정갈한 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사람과 함께 서서 설지 일행을 살펴 보고 있는 여인은 소도 한자루를 좌측 손에 움켜진 날렵한 옥빛 경장 차림이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요즘 강호에서 그 명성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일봉이룡이었다. 일봉이라고 불리는 여인은 구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청성파의 장문 제자이며 이룡 중에서 매화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이는 화산파의 매화검수인 곽성수이며, 나머지 일룡은 사일검법을 구성 가까이 익혔다는 점창파의 남도형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다른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에 비해 단연 두드러지는 존재로써 강호 무인들의 뇌리에 자신들의 이름 석자를 새겨 넣으며 커다란 명성을 쌓아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이들 세 사람은 자신들이 다음 대 구파일방을 이끌어 나갈 중심 인물들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있었으며 더불어 명문대파의 후인이라는 명예심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소림사만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십년전에 펼친 설지의 기행에 의해 절대고수의 길을 걷게 된 원각이라는 이름의 젊은 승려가 차기 소림제일인의 자리를 예약한 채 성장하고 있었으며 무당 역시 아직은 부족하지만 천고의 기재인 현진 도사가 다음 대 무당제일인의 자리를 예약하고 차분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아미타불! 그런데 세분 소저께서도 이번 회합에 초대받으셨읍니까?"
"아! 아니예요. 저희는 도사 할아버지 만나 뵐려고 왔는데 우연히 회합일과 겹치게 된거예요"
"허허, 그러시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이번 회합에 함께 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그 마화라는게 궁금해서 회합에 참가할 생각이예요. 그런데 저희를 내치지는 않겠죠? 그럼 안되는데..."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혹 반대하는 분이 계시다고 하더라도 소림사의 이름을 걸고 막아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혜명 대사가 소림사의 이름 까지 걸고 설지에게 호언장담하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뒷쪽 에서 웅혼한 도호 소리가 들려 오며 두 사람의 대화를 일시지간 가로 막는 것이 아닌가?

"무량수불! 허허, 혜명 대사께서는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신녀께서는 저희 무당의 손님이십니다. 당연히 무당의 이름으로 회합에 참여시켜 드려야겠지요"
"아미타불! 장문인께서 와 계셨구려"
"허허, 대화를 나누시는 중에 불쑥 끼어 들어 송구합니다."
"아미타불! 아닙니다.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녀께서는 무당의 손님으로 와 계시니 당연히 무당파의 이름으로 회합에 참여하시게 해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제가 주제 넘게 끼어 들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무량수불!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더 이상 무어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허허, 혜명 대사 께서는 못 뵌 사이에 무공 뿐만 아니라 입심 또한 일취월장 하신 듯 싶소이다,그려. 허허허"
"아미타불! 그런가요? 허허허" 

한편 무당 장문인 현허 도장과 소림사의 혜명 대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이들은 두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도검이 난무하는 듯한 환상에 사로 잡혀야 했다. 그만큼 성수신녀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무당파와 소림사의 입장에서는 무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 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설지와 진소청, 그리고 초혜가 그 주인공이었다.

"우와! 칼이 막 날아 다니는 것 같애, 혜아 내말 맞지?"
"응! 설지 언니 , 저기 봐봐 이번에는 언월도가 날아가고 있어" 
"응? 언월도? 호호호호"
"헤헤헤"

짤랑짤랑한 교소가 터져 나오자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현허 도장과 혜명 대사는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고 실소를 흘리며 기세를 거두어 들여야 했다. 난데 없는 언월도의 등장으로 인해 팽팽했던 기세 싸움이 일거에 종결되어 버렸던 것이다.

"장문진인! 그럼 회합은 언제 시작되는건가요?"
"무량수불! 구파일방의 수뇌부가 모두 도착하면 바로 열리게 될 것 입니다. 아마도 한 이틀 정도 후면 모두 도착할 것 같소이다."
"아! 그럼 이틀 후에 회합이 열린다는 이야기군요. 그럼 그날 마화가 공개되는건가요?"
"예.그렇소이다. 지금은 화산파에서 보관 중이나 회합이 시작되면 곧바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헤, 그럼 그동안 무당산 구경이나 해볼까? 그래도 되죠?"
"물론이외다. 장서각이든 어디든 가시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마음대로 가셔도 됩니다. 당장 보시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한편 무당파의 장문인 입에서 장서각이든 어디든 마음대로 구경하라는 말이 흘러 나오자 이를 듣고 있던 다른 문파의 인물들은 경악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려야 했다. 어디든 마음대로 구경하라는 말은 금지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과 진배없는 것이었다. 즉 무당파의 모든 무공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금지 구역인 장서각 마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데 하물며 다른 곳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도교의 본산이라고는 하나 엄연한 무림 문파인 무당파에서 자파의 절기가 보관되어 있는 장서각 마저 개방한다는 말은 지켜 보는 이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여인들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무당파에서 이리도 호의적으로 대하는지 지켜보는 이들은 점점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럼 꼬맹이 도사를 저희에게 빌려 주세요. 그런데 이 녀석은 어딜 간거야?"

이렇게 말한 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설지의 모습을 본 현허 도장은 설지가 말한 꼬맹이 도사라는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리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반색했다.

"꼬맹이 도사라 하면.... 아! 현진 사제를 말씀하시는구료"
"예. 현진 도사와 함께 다니며 무당산을 구경할래요. 도사 할아버지 그래도 되죠?"
"허허허.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내 뒷춤에 숨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야?"
"응? 호호호, 꼬맹이 도사 거기 있었구나. 보고 싶은게 많은데 안내 잘 해줄거지?"
"무량수불!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성 도장의 뒷춤에 숨어 있었던 현진 도사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며 마지 못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부터 꼬맹이 도사 현진의 피할 수 없는 여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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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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