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닿는 위치에 자리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자단목 목갑은 이 순간 평범한 목갑으로 변해 있었다. 목갑 안에 봉인 되어 있던 마화가 성수지환에 의해 지니고 있던 마기의 대다수를 빼앗겨 버린 탓이었다. 목갑에서 마기가 새어 나가기 시작하는 순간 잠시 당황했던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은 설지가 찬 성수지환이 마기를 흡수하는 과정과 성수지환이 발하는 공능을 차분한 시선으로 줄곧 지켜 보다가 무거운 목소리를 토해내며 중인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다.

"흠, 유모가 성수의가의 성수신녀께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응? 제게요?"
"그렇소이다. 신녀! 혹 천마지존환이 마기를 흡수할 때 내기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소이까?"
"성수지환! 천마지존환이 아니고 성수지환이예요. 그리고 내기에는 이상이 없었어요"
"아! 그렇구료. 미안하외다. 성수지환이라... 허면 성수지환이 공능을 발한 상태에서도 내기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는 말씀이시오?"
"예. 내기에 이상이 있었다면 저 보다는 초아가 먼저 알았을거예요"
'예? 초아라고 하셨소이까? 초아라면 누구를..."

설지의 입에서 초아가 언급되자 묵묵히 지켜 보고만 있던 현허 도장이 나직하나 거역하기 힘든 무거운 도호를 발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무량수불! 실례하겠소이다. 장문인께서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차후에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그러니 이만 마화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도록 하시지요"

현허 도장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어 가며 두 사람의 대화를 급작스럽게 중단시킨 것은 이 자리에 너무 많은 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설지의 모든 것이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로 부터 설지를 보호하기 위함에서 였다. 이런 현허 도장의 깊은 배려를 눈치챈 설지가 현허 도장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고마움을 대신했다. 지켜 보던 유도옥 역시 무슨 사정이 있음을 직감하고 말문을 닫아야 했다.

"무량수불! 허면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하고 다시 마화의 수송에 대해서 논의하시지요"
"험, 그럽시다. 그런데 이젠 마화가 마화가 아닌 것이 되었소이다. 그려, 허허허"

유도옥의 말 그대로였다. 불길함이 스멀스멀 새어나오던 목갑이 이제는 평범한 목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을 마친 유도옥이 목갑으로 다가가 스스럼없이 목갑에 붙여 놓았던 부적을 떼 버리고 목갑을 열어 젖혀도 마화에서는 더 이상 마기가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성수지환을 깨울 정도로 강력한 마기를 가지고 있었던 마화가 이제는 미약한 마기만을 담은채 기괴한 모습을 중인들에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응? 할아버지! 저게 마화예요?"
"그래. 그렇구나. 흠, 아마도 초상화의 입 부분인 것 같구나.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으냐?"
"음,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요. 혜아는 어때?"
"윽! 징그러워"
"호호호! 징그럽기는 뭐가 징그럽니"
"아냐, 아냐, 무지하게 징그럽게 생긴 입술이야. 그렇지? 청청언니!"
"그래. 네 말대로 흉칙하게 생겼구나"
"햐! 이 두사람 신기하네. 어떻게 입 전체도 아니고 일부분만 보고도 징그럽다느니 흉칙하다느니 그럴 수 있지?"
"아이 참! 설지 언니. 잘 봐봐. 저 입술 모양이 조금 이상하잖아"
"이상하다고? 뭐가?"
"저거, 저거 안보여? 입술 꼬리가 말려 올라간게 딱 봐도 사악한 심성을 가진 것 같잖아"
"그래? 날 잘 모르겠는데..."
"아휴! 답답해"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 하는 초혜의 말대로 입술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마화의 입술 꼬리는 말려 올려가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음험함이 그림의 입술을 통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내에 자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설지의 눈에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입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냥 입술 그림일 뿐이었다. 

한편 초혜가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 하는 그 순간 갑자기 장내에서 중인들을 경악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마기를 뺏겨 버린 마화로 부터 경악할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일부분만 남아 있는 사악하게 생긴 입술에서 유부에서나 흘러 나오는 듯한 기괴하게 뒤틀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던 것이다.

"크크크, 네놈들은 누구더냐? 본좌의 훼손된 초상화를 보고도 오체투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정파의 나부랭이들인가 보구나. 크크크. 기대하거라. 본좌가 부활하는 날을..."

마화에서 목소리가 사라지자 장내는 일순 정적 속에 휘감겼다. 마화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보다는 마화의 입을 통해 분명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던 것이다. 마화의 일부라고 짐작했던 그림이 사실은 천마를 봉인한 진짜 마화의 일부였던 것이다. 중인들이 마화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침묵에 빠져 있던 그 순간이었다. 돌연 장내에서 청량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 나와 중인들을 일깨웠다.

"어라? 혹시 천마 할아버지세요?"

설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설지의 이런 질문에도 마화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대답도 들려 오지 않았다. 중인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지 않았다면 잠시 전에 일어났던 일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천마의 재림이라니, 문헌으로만 접했던 절대 마교 시대의 역사에서도 치를 떨어야 했던 당금 강호의 명숙들은 서로를 돌아 보며 낭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무량수불! 허, 어찌 이런 일이. 무량수불"
"아미타불! 다들 놀라셨겠지만 이럴때 일수록 더욱 여기 자리하신 분들이 중심을 잃지 않으셔야 하오이다."
"그렇소이다. 이미 벌어진 일, 이제는 대비를 얼마나 어떻게 잘 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구료"

현허 도장과 혜명 대사 그리고 화산파 장문인이 이렇게 이야기하며 대책을 논의하는 쪽으로 이야기 가닥을 잡아 나가는 그순간 또 다시 중인들의 귀로 폐부를 시원하게 하는 청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설지였다.

"저기요! 저 마화말인데요"
"응? 설지야 무슨 일인게냐? 마화가 왜?"
"예! 할아버지, 아무래도 저 마화가 또 다른 마화와 기운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마화라고? 허면 네 말은 저 마화가 원래의 초상화와 그 기운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이런 말이더냐?"
"예. 그런 것 같아요. 아까 천마 할아버지가 부활 어쩌고 저쩌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저 마화와 초상화의 원본이 합쳐져야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뭣이!허면..."
"무량수불! 그 말씀이 사실이오이까?"
"음, 예,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저 마화의 처리를 우선으로 해야할 것 같아요"
"허, 이런 일이... 허면 저 마화를 어쩐다?"
"아미타불! 태워버리는게 좋지 않겠소이까?"
"어! 어! 안돼요. 안돼"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끼어드는 설지 덕분에 머쓱해진 혜명 대사가 설지를 돌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태우면 안된다니 어찌하여 그러시는지요?"
"헤헤!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도 태워 버리면 천마 할아버지를 봉인하고 있는 힘마저 사라져 버릴것 같거든요. 그러면 이 마화가 없더라도 부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허! 아미타불... 허면 무엇 보다도 이번 마화의 이송에 더 큰 신경를 기울여야 되겠구료"
"무량수불! 이렇게 되면 애초의 취지대로 마화를 만마관에 안치하기로 하고 그 이송에 대해서 의논들 하시지요"
"아미타불! 그리합시다."

그리고 이후 부터 장내는 마화의 이송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중인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다. 한동안 그런 중인들을 지켜 보던 일성 도장과 설지 일행은 조용히 장내에서 물러 나왔다. 대회합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던 일성 도장과 설지 일행은 그 결정에 따라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호북성 균현의 영기어린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한 무당산에서는 지금 긴 행렬이 산문을 나서고 있었다. 승도속의 각양각색의 복색 차림인 그 행렬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견고해 보이는 온통 검은 색의 마차 하나를 중심에 두고 천천히 하산하고 있었는데 행렬의 선두 어림에는 특이한 동행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세 여인과 이제 십여세 정도 되어 보이는 도복 차림의 소년 한명, 그리고 얼핏 보면 신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탈속한 모습의 도인 한명이 바로 그 특이한 동행이었다.

이들은 바로 설지 일행과 일성 도장, 그리고 일성 도장의 제자인 현진 도사였다. 구파일방의 대회합 끝에 마화의 이송에 한발 걸치게 된 꼬맹이 도사 현진은 지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들뜬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현진 도사의 이런 마음은 사부인 일성 도장의 손을 잡고 무당산에 오른 이후 단 한번도 속세에 내려간 적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마화의 이송이라는 중대한 사명은 이미 뒷전에 처박아 버린지 오래인 현진 도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초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초혜 사저!"
"응? 왜? 무슨 일이야?"
"아,아니, 저기 그냥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응? 뭔데 이야기 해봐"
"예. 그러니까 저기 성수신녀의 품에 안겨 있는 저 고양... 아니 호랑이가 궁금해서요"
"아! 백아말이구나. 뭐가 궁금한데?"
"예. 태청관에서 얼핏 봤는데 백아가 공중을 걸어 가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잘못 본건 아니지요?"
"응? 아! 그거! 맞아, 잘못 본거 아냐. 허공답보야. 허공답보!"
"예? 허공답보요? 그냥 뛴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그냥 뛰어? 호호호, 아냐, 허공답보야 허공답보!"
"허,허면, 대관절 저 백아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아! 우리 귀여운 꼬맹이 도사 사제가 모르고 있었구나. 백아는 천년마령호야. 천년마령호!"
"헉! 처,천년마령호!"

꼬맹이 도사 현진의 경악성이 커져 가는 이 곳은 호북성 균현의 무당산 산문 인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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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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