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청 언니! 혜아! 준비 다 했어?"
"응! 언니"
"예! 아가씨.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일성 도장을 천막 바깥으로 내쫓듯이 내보낸 후 서둘러서 지난 밤의 달콤했던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 입은 세 여인들이었다. 다시 한번 서로의 옷매무새를 살펴 보고 이상 없음을 확인한 세 여인들은 백아와 호아를 앞장 세우고 천막을 빠져 나왔다. 그런 그녀들의 손에는 제각기 한자루씩의 검이 들려 있었다. 단 한번도 검을 패용하지 않았던 설지 까지 애검인 묵혼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확인한 일성 도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한 채 설지에게 다가갔다.

"왠일이더냐? 네가 검을 다 들고 나오다니?"
"아! 도사 할아버지! 아무래도 묵아가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를 것 같아서요. 간밤에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흠. 하긴 그 멍청한 놈들이 걱정이긴 하다만..."
"그 사람들이라면 걱정마세요. 흐릿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가 느껴지는걸로 봐서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예! 도사 할아버지! 저기 중턱 어림에서 흐릿한 기가 여럿 느껴져요"
"허허, 네 경지가 벌써 그 정도 까지 발전했더냐?"
"헤헤, 별거 아니에요. 그럼 저희 다녀올게요"

일성 도장과 몇마디를 나누며 간밤에 사라진 후기지수들이 아직은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설지가 일행들과 함께 귀둔산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아직은 어린 앳된 사내 아이의 목소리 하나가 그런 일행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기, 설지 누님!"

간밤에 설지의 도움으로 불완전하게 흔들리던 혈맥을 다잡은 현진 도사였다. 그러고 보니 현진 도사의 모습이 지난 밤과는 또 다시 달라져 있었다. 애기 피부 같은 뽀얀 피부는 그대로였으나 몸 전체를 은은히 감싸고 흐르던 서기가 사라져 버려 일견하기에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까만 눈동자에서 잠깐씩 드러나는 예리한 신광은 이 소년이 결코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설지의 도움을 받아 혈맥을 다스리고 공청석유의 공능을 모두 내공으로 갈무리한 지금 현진 도사에게는 무려 2갑자에 해당하는 내력이 단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무당파에 전해지는 대부분의 무공을 이미 체득하였으며 거기다 2갑자에 해당하는 내공이 보태졌으니 현진 도사에게는 무당 잠룡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여간 그런 현진 도사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귀둔산을 오르려는 설지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응? 어라? 꼬맹이 도사! 더 안자고 왜 벌써 일어났어? 애들은 많이 자야 돼. 얼른 들어가"

자신이 소리쳐 부르는 목소리에 농을 섞어 대답하는 설지의 모습을 본 현진 도사가  불퉁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애라니? 누가요?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애가 어디있니?"
"설지 누님!"
"아이코! 이 자식이! 귀청 떨어지겠다. 이 눈부신 미모의 누님이 귀가 멀면 어쩌려고 큰소리냐?"
"에? 눈부신 미모요? 크크크"
"어라? 이 자식 봐! 야! 꼬맹이,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이 누님이 한 미모한다는 소문은 중원 전역에 걸쳐 짜하게 퍼져 있단 말이야"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허참, 요 꼬맹이가 그래도... 아! 참참 이럴 때가 아니지 너 무슨 일이야? 왜 바쁜 사람 걸음은 붙들고 그래?"

시덥잖은 농을 던지던 설지에 맞서 여턔껏 농으로 응수하던 현진 도사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면서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지 누님!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응? 너도 함께?"
"예"
"음... 글쎄..."
"설지 누님!"
"음... 잠깐만... 아니 안되겠어. 이번에는 안돼, 너무 위험하니까 도사 할아버지랑 함께 있어"
"설지 누님!"
"글쎄 안된데도 우리가 상대할려는 존재가 무인이라면 함께 가겠지만 그게 아니야. 그러니 안돼"

설지의 단호한 반대에 울상을 지은 현진 도사가 이번에는 사부인 일성 도장을 향해 측은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사부님! 함께 가게 허락해 주십시요"
"허허, 녀석 기운이 뻗치나 보구나. 하지만 설지가 말했듯이 안된다. 간밤에 올라 갔던 후기지수들도 여지껏 종무소식이 아니더냐?"
"하아~"

사부인 일성 도장 까지 반대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표정을 한 현진 도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설지야! 너희들만 가려는게냐?"
"응? 아! 아니예요. 간밤에 사라진 후기지수들도 데려와야 하니까 보표 아저씨들이랑 함께 갈게요"
"그래,그렇게 하거라. 무당십이검 모두 데려 가거라"
"아미타불! 저희 소림의 십팔나한들도 함께 데려 가시죠"

무당파와 소림사의 무력을 대표하는 무당십이검과 소림 십팔나한이 언급되자 이때 까지 묵묵히 지켜 보고만 있던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도 뒤늦게 한팔을 걷어 부쳤다.

"우리 화산에서도 매화십이검수를 딸려 보내드리겠소이다"

유도옥이 갑작스럽게 매화십이검수를 설지에게 딸려 보내려는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설지로 부터 무당과 소림에 기연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혜명 대사로 부터 전해들었던 유독옥이었기에 내심으로는 이번 기회를 틈타 매화십이검수에게도 또 다른 기연이 찾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우와! 설지 언니, 무당십이검과 소림 십팔나한, 그리고 화산의 매화십이검수라니, 혹시 우리 마교와 전쟁이라도 벌이러 가는거야?"
"호호호. 그러게"
"허허허"
"아미타불"
"크흠"

제각기 기묘한 표정을 한 채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었다. 한편 화산파의 결정이 이렇게 내려지자 설지의 귀둔산 행은 절대 고수 사십이인이 함께 하는 셈이 되어 버렸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그들이 설지를 중심으로 도열하자 설지의 입에서는 명령이 아닌 당부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귀둔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반드시 저희들의 뒤에서 따라 오셔야 해요. 아셨죠?"
"무량수불!"
"아미타불!"
"원시천존!"

각기 도호와 불호로 대답을 대신하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쭈욱 돌아 본 설지가 백아와 호아를 앞장 세우고 걸음을 옮기자 뒤를 따라서 진소청과 초혜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무당과 소림 그리고 화산의 무인들이 반원형으로 길게 늘어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설지와 일행들을 둥근 원형진으로 보호하기 위한 사전 준비였다. 걸음을 옮겨 귀둔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장엄해 보이기 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들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백아와 호아와 함께 걸어가던 설지가 경공을 전개해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을 부유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다름아닌 소림사의 최고 경공이라는 연대구품이 시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지의 뒤를 이어서 진소청과 초혜 역시도 나란히 연대구품을 시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제 보니 우리 무당 뿐 아니라 소림에서도 밑천을 다 털렸구려?"
"아미타불! 허허허"
"저,저,저... 대사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세 여인들에게서 시전되는 연대구품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더듬기 까지 하는 유도옥이었다.

"아미타불! 장문인의 짐작이 맞소이다. 지금 신녀 일행이 시전하는 경공이 바로 본사 최고의 경공이라는 연대구품이외다."
"허면 소림에 기연이 전해진게 아니고 신녀에게 기연이 전해진 것이 아니오이까?"
"예? 허허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아니외다. 신녀께서 잊혀졌던 연대구품을 찾아 본사에 돌려 주었지요"
"아! 허면 기연이라는 것이..."
"허허허, 아미타불! 물론 연대구품도 기연은 기연이지만 신녀께서 소림에 안겨준 기연은 그런 것이 아니외다."
"허! 이거 참, 갈수록 궁금해지는구려"
"허허허"
"아미타불"

일성 도장과 혜명 대사 그리고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이 귀둔산을 오르는 일행들의 뒷 모습을 지켜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연대구품을 시전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던 설지는 귀둔산의 초입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고 세밀히 온 산에 퍼져 있는 기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 설지의 기감에 아까 보다 더욱 확실하게 흐릿한 기 십여개가 느껴졌다.

아마도 간밤에 사라졌다는 후기지수들에게서 흘러 나오는 기가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십여개나 되는 흐릿한 기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가운데에 두고 한자리를 빙빙글 도는 듯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 이상한데.."
"응? 왜 그래, 설지 언니?"
"응? 아! 그러니까 저기 중턱 어림에서 사람들의 기가 흐릿하게나마 느껴지는데 그게 좀 이상해서"
"이상해? 뭐가?"
"그게 말이야.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애. 주변에 결개라든가 진법의 흐름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말야"
"음, 그렇다면 진짜 이상하네, 그렇지 청청 언니?"
"그래. 내가 보기에도 조금 이상하구나. 아가씨 어쩌시겠어요?"
"어쩌긴 확인해 봐야지, 자 지금 부터는 조심들 하셔야 해요"

설지가 다시 한번 세 문파의 무인들에게 당부를 하고 앞장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나아가는 설지를 비롯한 세 여인들의 경공 수준은 뒤를 따르는 절대 고수들에게서 적잖은 감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매화십이검수가 느끼는 경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성수신녀라는 별호로 중원 전역에 소문이 자자한 설지지만 원래 소문이란 그다지 믿을만한게 못되는 법.

소문이 과장되게 부풀려져 있다고 잠시 전까지 생각했었던 매화십이검수이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설지를 비롯한 세 여인들에게서 무공을 익힌 흔적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세 여인들의 무공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매화검수 자신들을 뛰어 넘는 무력을 세 여인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매화검수들이 경악할만한 일들은 앞으로 더 많겠지만...

 

"모두 멈춰요"

매화검수들이 상념에 빠진채 산을 오르고 있을 때 앞서서 산을 오르던 설지가 멈춰서며 입에서 나직하나 단호한 음성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런 설지가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설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일행들이 안력을 돋구어 살펴 보니 그 움직이는 물체는 다름아닌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간밤에 사라졌던 후기지수 열명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일행들이 그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니 눈동자는 풀려 버려서 힘이 없었고 그들의 발걸음은 흐느적거리다 못해 쓰러지기 일보직전 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힘겨운 걸음으로 쉼없이 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엇에라도 갖힌듯한 모습이었다.

"설지 언니, 저 사람들 왜 저래?"
"흠, 글세? 얼핏 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지를 제압당한 것 같애"
"이지를 제압당했다고? 그럼 미쳤단 말이야?"
"그런 셈이지. 서둘러야 되겠다. 이미 탈진하기 시작한 저들을 그대로 두면 위험해"

그렇게 말한 설지가 앞서서 몸을 날려 한자리를 맴도는 후기지수들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그렇게 후기지수들에게 다가간 설지가 한사람씩을 스칠 때 마다 후기지수들은 그 자리에 픽픽 쓰러져 움직임을 멈추었다. 뒤 따라 온 세 문파의 무인들에 의해 쓰러진 후기지수들이 한 자리에 나란히 눞혀지자 설지는 후기지수 한사람에게 다가가 세말하게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식경 가량을 살펴 본 설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설지 언니! 어때?"
"휴! 이지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뇌를 다치지는 않았어"
"그럼 시침으로 인당혈과 뇌호혈을 자극하면 이지를 회복하겠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청청 언니도 도와줘"
"예. 아가씨"

익숙한 솜씨로 세 여인들이 후기지수들에게 시침을 해나가기 시작하자 세 문파의 무인들은 혹시라도 있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삼엄한 경계 태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시진 정도가 지나자 쓰러졌던 후기지수들이 하나 둘씩 이지를 회복하고 깨어나기 시작했다.

"헉! 여, 여기가..."

제일 먼저 깨어난 화산파 후기지수의 입에서 흘러 나온 당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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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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