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신이 드는게냐?"

화산파의 목자성은 지난 밤 사형인 자인걸을 따라서 조용히 숙영지를 빠져 나와 일행들과 함께 귀둔산에 올랐었다. 십여명의 동료 후기지수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귀둔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목자성은 산의 중턱 즈음에 도달할 즈음 기이한 상황 하나를 목도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선녀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그 여인은 마치 허공을 날아 오듯이 스르르 미끄러져 자신들에게 다가 오더니 손에 들린 비파를 조용히 퉁기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였다. 목자성이 지난 밤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목자성은 받고 있었다.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가 탄주하는 비파 소리를 접한 후 어찌해볼 사이도 없이 한순간에 정신을 잃어버렸던 목자성의 눈꺼풀이 힘겹게 뜨여 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무인이었다. 그것도 구파일방의 하나인 대화산파의 후기지수로써 차기 매화검수의 재목으로 사문에서 인정 받고 있는 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무방비의 상태에서 깨어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화들짝 놀란 목자성은 단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변을 경계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경각심을 일깨우던 모자성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목자성이 두통을 잠시라도 날려 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서 자신들의 사숙이자 매화검수의 수장인 화지경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자신들의 사숙인 화지경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이인으로 구성된 화산파의 매화검수 전체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벼른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은연 중에 주위로 흩뿌리는 십이인의 매화검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서 기세 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목자성은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사,사숙!"
"그래. 내가 사숙인줄은 알고는 있는게냐?"

하지만 화지경의 준엄한 한마디 질책이 목자성의 그러한 시도를 아예 원천 차단해 버렸다. 이에 목자성은 제대로 된 변명 한마디 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지난 밤, 자신들이 머무르는 천막으로 직접 찾아 와서 절대로 귀둔산에 오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이가 바로 화지경이었던 것이다. 존장의 명을 어긴 셈이 되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묵묵히 처분만 기다리는 수밖에는... 그렇게 좌불안석하는 목자성을 위기에서 구원해 준 것은 뜻밖에도 낭랑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아가씨! 이 사람 좀 봐 주세요"
"응? 청청 언니, 왜 그래?"
"이 사람 아무래도 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예요"
"그래? 어디 한번 봐"

진소청이 난색을 표하며 손으로 가리키는 인물은 목자성과 같은 화산파의 도복을 걸치고 있는 후기지수였다. 바로 목자성의 사형인 구장호라는 후기지수로 그 역시 차기 매화검수로 지목될 만큼 출중한 능력을 겸비하고 있는 화산파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몽 속을 헤매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매화검수 십이인 모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구장호를 살펴 보는 설지의 등 뒤로 다가 서서 고개를 쭈욱 빼고 구장호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음, 청청 언니 말대로 이사람 뇌에 문제가 있네. 어쩐다?"
"시,신녀!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뇌에 문제가 있다니..."

지켜 보던 매화검수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설지의 말에 당황하여 이렇게 불쑥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음! 말 그대로예요. 뇌에 문제가 있기는 한데.. 그게..."
"그게라니.. 허면 고칠 수 없다는 말씀이시오?"
"헤, 그게 말이죠. 뇌가 사기에 잔뜩 침습당하여 일반적인 침술이나 의술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허,허면 못 고친다는 말씀이시오?"

보다 못한 화지경 까지 나서서 이렇게 반문하자 상큼한 미소를 베어 문 설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치료가 가능하긴 한데..."
"허면 무엇 때문에..."
"설아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설아라니? 설아가 누군데 그러시는지요?"
"설지 언니, 진짜 설아가 고칠 수 있어?"
"아마 그럴걸. 녀석이 배가 통통하게 튀어 나오도록 사기를 들이 마신 후 탈피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 뵜잖아"
"아! 그러네. 뇌가 사기에 침습당했다니 설아더러 마시라고 하면 되겠구나"
"그렇지? 어디보자. 설아 이리 나와 봐"

중간에 불쑥 끼어든 초혜 때문에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던 화지경과 매화검수들의 의문은 설지가 메고 있는 가방 속에서 빠져 나오는 설아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해소될 수 있었다. 한편 설지의 가방 속에서 적실영과 한알을 입에 넣고 좌우로 굴려 가며 기분 좋게 놀고 있던 설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오자 입 속에 넣었던 적실영과를 한 쪽에 고이 내려 놓고 스르르 움직여 가방 속을 빠져 나왔다.

"설아! 이 사람 좀 봐봐. 네가 좋아하는 사기가 머리 속에 가득차 있는데 들이 마실 수 있겠어?"

설지의 손바닥 위에서 구장호의 가슴 위로 자리를 옮긴 설아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구장호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구장호를 살펴 보았던 설아는 내심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설지를 돌아 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기가 잔뜩들어 있는 것이 꽤 먹음직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설아는 당장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설지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었다.

"응? 왜 그래? 아! 깨물어야 하는거야?"


설지가 이렇게 이야기 하자 날키로운 이를 드러 내었던 설아가 그 말이 맞다는 듯 작은 머리를 앙증맞게 끄덕였다.

"호호호. 그럼 그렇게 해. 대신 꽉 물어 버려. 말 안듣는 사람은 물려도 돼."
"호호호"

"호호호"
"무량수불"
"아미타불"

꽉 물어 버리라는 설지의 말에 진소청과 초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으며 무당십이검과 소림 십팔나한은 도호와 불호로써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것은 화산파의 매화십이검수와 목자성 뿐이었다. 한편 설지의 허락을 얻은 설아는 꼬물꼬물 기어가듯이 구장호의 머리 위로 올라 가서는 작은 입을 한껏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구장호의 머리 속에 박아 넣고는 서서히 사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식경 정도가 지나자 구장호의 표정은 평온해 졌으며 사기를 모두 흡수한 설아는 배를 통통 두들기며 설지의 가방 속으로 다시 들어 갔다.

"설아! 수고했어! 응?"

설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던 설지의 고개가 한순간 다른 방향으로 돌려졌다. 그와 동시에 진소청과 초혜 역시 설지가 고개를 돌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세 여인 모두가 시선을 주고 있는 그곳은 일행들이 있는 주변 보다 음영이 깊은 곳으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컴컴할 정도로 볕 조차 찾아 들기 힘들게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이렇게 세 여인이 갑자기 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자 가장 먼저 무당십이검이 설지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흩어지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소림 십팔나한이 경계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매화검수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 보다 마지 못한 듯 넓게 흩어지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 매화검수들의 귓전으로 설지의 음성이 날아 들었다.

"나와! 어쭈 안나온다 이거지. 셋 셀동안 나와. 하나, 둘"

설지의 입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헤아려지는 순간 음영 깊은 숲 속의 어느 한곳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작은 체구의 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헤헤.설지 누님! 저 나왔어요"

"소사숙!"

"아하하, 청진 사질도 계셨네요"
"뭐? 아하하, 청진 사질도 계셨네요? 야! 꼬맹이 너 뭐야?"

숲 속에서 튀어 나온 것은 무당 소사숙 현진 도사였다. 한편 지금 이 순간 장내에 있던 매화검수는 갑작스럽게 튀어 나온 현진 도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무척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현진 도사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무당십이검과 소림 십팔나한의 이목을 모두 피한 채 이토록 근접 지역에 은신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첫번째 놀라움이었으며 그런 현진 도사를 세 여인이 거의 동시에 찾아 냈다는 것이 두번째 놀라움이었다.

"말해 봐, 어떻게 된거야?"
"헤헤, 그게 사부님 께서 조용히 뒤따라 가보라고 하셔서... 아! 반드시 설지 누님 근처에만 있으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뭐? 아휴, 이 노인네가..."
"설지 언니!"
"아가씨!"
"무량수불!"
"앗, 미안해 취소, 취소, 노인네라고 한 거 취소할게. 아휴 노인네를 노인네라고 하지 못하는 이 빌어먹을 세상, 아휴!"
"호호호"
"호호호"

"무량수불"
"꼬맹이, 이렇게 된거 할아버지 말씀대로 내 주위에서 세 걸음 이상 벗어나지 마, 알았어?"
"예!  설지 누님, 걱정마세요"
"아 참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아까는 겨를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을 여기서 빙글빙글 돌게 만든게 뭐였지?"

그렇게 말하면서 설지가 걸음을 옮겨 후기지수들이 빙글빙글 배회하던 곳으로 다가 갔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 보려는 설지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주위로 후기지수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가운데에 약초로 보이는 잎사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이건 하수오 아냐?"
"우와! 설지 언니, 저것 제법 튼실해 보이지 않아?"
"그러게 어디 한번 볼까. 일어서"

설지의 입에서 일어서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매화검수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기사가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 땅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흙으로 만든 사람 같은 형체 하나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모양 형체의 왼쪽 가슴 어림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약초 하나가 박혀 있었다. 설지가 말했던 바로 그 하수오였다.

"우와! 설지 언니, 이거 아무래도 영초인 것 같애"
"그래. 아무래도 천년은 족히 묵은 것 같구나."
"천년하수오!"

한 목소리로 경악성을 토해내는 매화검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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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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