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 언니! 왜 그래?"
"응? 아! 그게 말이야. 지금 여기 보이는 소저... 아니, 아니지, 소저 처럼 보이는 허상에서 뿜어 지는 기운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져서 그래"
"익숙하다고? 음, 그거 참 신기하네. 참! 아니지, 그것 보다 설지 언니! 이 진이 기로 이루어진 허상을 가둘 수도 있었던 거야?"
"응? 그러고 보니... 아! 호호호"
"왜 그래?"
"호호, 초아, 초아 때문이야"
"아! 그렇구나. 어쩐지, 그런데 저 허상은 어떡할거야? 우리가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익숙한 기운이라는 건 또 뭐야?"
"음, 그러게, 별수 없이 여기 생성된 공간을 부숴버려야 하나?"
"아이 참! 설지 언니! 그 익숙한 기운이라는게 뭐냐고?"
"아! 그거, 호호호, 다른게 아니고 저 허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초아의 것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익숙하다고 한거야"
"응? 초아랑 비슷하다고? 그럼 뭐야, 저 허상이 만년삼왕의 기운을 빌려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거야?"
"호! 우리 혜아 제법 똑똑한데, 그래 네 말대로야."
"헤헤헤! 그 정도 쯤이야"
"호호, 녀석,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만년삼왕은 아닌 것 같아."
"아니라고?"
"응! 아마도! 확인해 보려면 직접 저 공간이 장악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들어간다고? 어떻게? 아무리 봐도 발길을 쉽게 허락할 것 같진 않은데, 더군다나 만년삼왕과 비슷한 영물이 저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면 더 어려울텐데?"
"호호호! 이게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미는 설지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우는 칼 묵혼이었다. 검파와 검신을 나누는 검반에 벽옥색을 가진 용의 내단이 박힌 묵혼을 들고 해맑은 미소를 베어 문 설지가 주위를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그 소저는 풀어 줘야 겠지, 청청 언니, 혜아, 해진하고 물러서, 그리고 다른 분들도 뒤로 물러 나세요"

이제껏 진의 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비파를 든 여인의 허상은 그제서야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엔가 놀란 듯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왔던 공간 속으로 다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는 여인의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지는 실로 오랜만에 묵혼의 검신을 검집 속에서 빠져 나오게 한 후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 본 후 묵혼의 검신에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무튀튀하던 묵혼의 검신이 뿌연 빛무리에 휘감기는 듯 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기분 좋은 용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묵혼을 눈 높이로 들어 올려 앞으로 내뻗은 설지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잠깐! 잠깐! 설지 언니, 지금 혹시 사랑과 협의의 이름으로 어쩌구 저쩌구 그런 말 하려던건 아니지? 그렇지? 응? 응?"
"응? 맞는데!"
"으아악! 설지 언니! 주변을 한번 돌아 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꼭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해야겠어?"
"호호호, 뭐 어때서, 혜아 네가 아무리 말려도 난 할거야!"
"아유! 못말려"
"호호호"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초혜와 설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모두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을 제외하고서... 하지만 이내 매화검수들도 초혜가 했던 부끄럽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방의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검을 겨눈 설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 나왔던 것이다.

"사랑과 협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얍!"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듣게 된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은 이 순간 모두 피식하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 순간 설지의 검 끝에서 파생된 수많은 강기 다발이 마치 유성우가 뿌려지듯이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실소를 하며 조금씩 벌렸던 입들을 급히 다물어야만 했다. 행여나 주위의 다른 이들이 그런 자신들의 실소를 목격하지 않았나 다급히 주위를 한번 돌아 보면서 말이다.

한편 묵혼의 검신에서 빠져 나와 전방의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날아간 강기 다발은 마치 공간을 찢어발기기라도 하려는 듯 거침 없이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내 요란한 폭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기이하게 일렁거리며 왜곡되어 있던 공간이 서서히 사람들에게 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설지가 뿌린 검강이 영물이 만든 기운과 충돌하면서 영물의 기운으로 만들어졌던 공간의 장악력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그동안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던 공간 속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모두의 시선에 박혀 들었다.

"헉! 저,저건..."

공간을 왜곡시켰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숲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자 신기해 하며 주위를 살펴 보던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사방 삼장 정도의 넓은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산삼 한뿌리였다. 작은 잎사귀를 통해서 일반적인 산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기운을 주변으로 뿌리고 있는 그 산삼은 일견하기에도 대단한 약효를 지닌 영초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기사가 설지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매화검수들을 경악하게 한 그 기사의 근원지는 바로 설지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초아였다. 설지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초아가 공간이 열리자 설지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어린 동자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동으로 변한 만년삼왕 초아는 사람들을 향해 밝은 미소를 얼굴에 그려 보이고는 공간 속에서 자라고 있던 산삼을 향해 다가갔다.

"설지 언니! 초아가 왜 저래?"
"흠, 글쎄?"
"설지 아가씨, 아무래도 초아가 저 산삼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 하네요"
"그러게"


진소청의 말 그대로였다. 산삼 앞으로 걸음을 옮겨 다가갔던 초아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산삼의 잎사귀들을 부드럽게 쓸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른이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한편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산삼의 잎사귀들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던 초아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설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설지에게 다가온 초아는 마치 설지에게 안기려는듯이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켜보는 매화검수들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내뱉는 순간이었다. 설지에게 안겨 들었던 어린 소동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설지의 가슴팍에 원래 부터 있었던 작은 산삼 모양의 장신구 하나가 다시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초아는 설지에게 산삼과 얽힌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음, 그랬구나?"
"응? 뭐가?"
"아! 호호, 저기 산삼말이야, 초아와 관련있는 삼이 맞데"
"정말?"
"응!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자식 같은 그런 존재인거지"
"햐! 정말? 그럼 저 산삼이 초아의 후손이란 말이야?"
"응! 그렇데. 오천년 정도를 살았다고 하는걸"
"우와! 오천년이나... 그래서 이렇게 강력한 기파로 주변 공간을 장악했던 거구나"
"그렇지, 그런데 초아의 말대로라면 저 산삼은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아"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응, 그러니까 저 산삼이 지독한 원념과 사기에 잠식되어 의도치 않게 허상을 만들고 사람들을 해쳤었던 것 같아."
"설지 언니, 원념이라고 했어? 누구의 원념?"
"글쎄? 그건 지금 부터 확인해 봐야지. 그것보다 저 산삼을 저대로 두면 안되니까 먼저 산삼 부터 채취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
"알았어, 설지 언니,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할게"

그렇게 서둘러서 산삼을 채취한 설지가 주변의 고운 이끼를 뜯어 산삼을 곱게 싸매고는 설아가 지키는 가방 속으로 집어 넣었다. 산삼이 잠식당한 원념과 사기는 이제 부터 설아에게 모두 먹히게 될 것이고 산삼 고유의 신성한 기운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산삼의 갈무리를 끝낸 설지는 산삼이 자라고 있던 삼장 공간 주변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산삼을 물들게 했던 원념과 사기의 주인공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살펴 보던 설지가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한 것인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보표 아저씨!"

매화검수들을 다시 당황하게 만드는 음성 하나가 설지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이내 무당십이검의 수좌인 청진 도사의 입에서 무량수불하는 도호가 뒤따랐다.

"무량수불! 말씀하시지요?'
"여기 바닥을 조심해서 파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예?"
 "아이 참! 여기 아래에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 조심해서 파헤쳐 보시라고요"
"아! 예"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던 청진 도사가 이내 진중한 모습으로 설지가 말한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하며 모든 이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지켜 보는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청진 도사의 손에 의해서 파헤쳐지는 바닥 아래에서는 언뜻 보기에도 옷으로 보이는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 옷의 주인이 마침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 왔다.

여인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듯한 모습이지만 허름한 마의 차림의 시신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천년이나 묵은 산삼의 신묘한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얼굴 여기 저기에 상처와 멍이 남아있긴 했으나 걸치고 있는 의복과는 대조되게 언뜻 보기에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 아마도 살아 생전에는 대단한 미모로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을 성 싶었다.

 

"흠, 보표 아저씨, 이제 부턴 제가 할게요"

그렇게 말한 설지가 드러난 시신의 여기 저기를 세밀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지켜 보는 이들 모두가 드러난 시신의 하복부를 가리고 있는 의복에 묻은 핏자국 만으로도 이 여인이 생전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능히 짐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흠, 간살당한게 맞네."

설지의 입에서 간살이라는 말이 흘러 나오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변 공간 전체가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입에서 당혹성이 뱉어질 만큼 지독한 한기는 바로 분노한 진소청이 자신도 모르게 은연 중에 내뿜는 기운 때문이었다.

"으아악! 얼음 마녀 언니, 진정해!"

다급하게 내뱉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설지였다. 설지가 진소청을 향해 일전에 얼음 마녀라고 불렀던 것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진소청이 북해빙궁의 빙공 보다 더 싸늘한 냉기를 토해내게 된 것은 태극혜검을 십이성 대성한 이후 부터였다. 음양의 기운을 마음먹은대로 수발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나서 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호호. 됐어. 그보다 아까 봤던 그 허상을 다시 불러내 봐야겠어."
"예? 어떻게요?"
"우리에겐 초아가 있잖아. 초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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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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