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설지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초아의 작은 잎사귀들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은 가슴 속이 청량해지는 것 같은 청아한 향기와 기이한 파동이 설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는 기이한 파동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싸늘하게 식어 버린 여인의 시신이었다.

"설지 언니! 초아가 어떻게 아까의 그 허상을 불러낸다는 거야?"
"호호, 궁금하니? 지켜보면 알게 될거야"

설지의 말 그대로였다. 초아에 의해서 생성된 기아한 파동은 여인에게 당도한 순간 갑자기 새하얀 빛무리가 되어 여인의 시신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여인의 시신에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무리가 백회혈을 중심으로 모여 드는 것 같더니 흐릿한 기의 형체가 시신의 백회혈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 나온 흐릿한 기의 형체는 허공 중에서 한차례 꿈틀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을 경악하게 만들며 사람의 형체를 띄어 가던 기의 모습은 어느 순간 완전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지켜 보고 있지 않았다면 살해당한 여인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착각할 만큼 너무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설지 언니! 저 언니의 허상은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언니의 허상이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초혜의 말 처럼 초아에 의해서 다시 불려 나온 여인의 허상은 죽은 여인의 시신과 완전히 똑 같은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 비파를 든 아름다운 비단 의복의 모습이 아니라 허름한 마의를 입은 생전의 여인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죽은 여인이 오쳔년 묵은 산삼의 영기를 빌려 생전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동안 사람들에게 보여진 듯 했다.

"글쎄? 물어 보면 알겠지. 소저! 제 말 들려요?"

완전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기의 형체는 설지가 말을 걸어 오자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헤헤, 다행이다. 그렇다면 소저는 누구예요?"

 

설지의 질문을 받은 기의 형체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한차례 입을 벙긋 거렸으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설지가 다시 초아의 도움을 받아 기의 응집을 북돋워 주자 그제서야 미약하지만 떨리는 것 같은 가녀린 말 소리가 여인의 입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저는 매군려라고 한답니다."
"아! 매소저시군요. 저는 나설지라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예. 그러니 걱정마시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세요"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그후로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여인의 설명을 간추려서 이야기 하면 사정은 이러했다. 죽은 여인의 귀신이 나타나면서 부터 귀둔산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한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박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인은 박산 인근의 박산현에서 약초상을 하는 늙은 아비와 함께 약초를 채집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한편 여인은 살아 생전에 용모가 워낙 아름다웠던 덕분에 근동에 까지 그 출중한 미모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며 재력가에서 부터 가난한 학사에 이르기 까지 숱한 뭇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었다.

당연히 돈과 패물을 동원한 숱한 유혹이 중매라는 이름으로 밀려 들어 왔다. 하지만 여인은 늙은 아비를 홀로 두고 결혼할 수는 없다며 모두 뿌리치고 아비를 봉양하는 그 속에서 작은 보람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너무도 아름다운 용모가 화근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아비와 함께 박산으로 약초 채집을 나왔던 여인이 사냥나왔던 박산현령의 첫번째 아들 눈에 띄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부터 각종 패물 등을 동원한 물량공세가 현령의 아들로 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청이 모두 거절 당하자 이에 화가 치민 현령의 아들이 결국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관병을 동원해서 약초 채집을 나온 여인과 여인의 아비를 포위하고 소위 말하는 인간 사냥을 했던 것이다. 일부러 빗나가게 쏘는 화살을 피해 산 속을 헤치며 부리나케 도망다니던 여인과 아비는 결국 힘에 부쳐 쓰러지고 그런 여인과 아비는 현령의 첫번째 아들 손에 붙잡히게 된다.

여인이 보는 앞에서 여인의 아비를 잔인하게 살해한 현령의 첫번째 아들은 군관 십여명과 함께 여인을 능욕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기력이 다한 여인도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여인의 이야기가 여기 까지 진행되자 갑자기 산속에 한 겨울이 찾아 온 듯 싸늘한 냉기가 숲속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절대고수들로 구성된 수색대의 무인들 까지 추위를 느껴야 할 만큼 싸늘한 냉기는 바로 진소청이 뿜어 내는 기운이었다.

평소에는 무위식 중에 가끔씩 냉기를 배출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예 작정이라도 한듯 거침 없이 냉기를 토해내며 주변을 얼려 나가고 있는 진소청의 모습은 설지의 말대로 얼음 마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으! 시원하다."

모든 무인들이 화급히 공력을 운기하여 추위를 몰아낼 즈음 이렇게 말한 초혜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내 설지의 옆구리 쪽으로 찰싹 달라 붙었다. 그러고 보니 설지의 주변으로만 싸늘한 냉기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지 언니, 청청 언니가 화 많이 났나 봐"
"그러게. 혜아는 괜찮아?"
"응! 난 괜찮아. 설지 언니 옆에 딱 붙어 있으면 계속 괜찮을걸. 헤헤"
"음,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러다 나무들이 다 얼어 죽겠어."
 "그러게. 청청 언니! 설지 언니가 이제 그만하래"
"응? 아! 그래, 미안,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 됐어. 그보다 매소저!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건 잘못된 일 같은데요"
"아니예요. 소인은 그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 뿐 해하려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밤의 무인들을 그렇게 만든건 무슨 연유인가요?"
"그건... 그 분들이 제 모습을 보고는 먼저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죄송합니다"
"흠,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무인이 아닌 사람들을 공격한 적은 없나요?"
"예. 없었습니다. 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혼비백산하여 무작정 도망치다 넘어져 다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랬군요. 그런데 그 모습은 어떻게 된거죠? 아까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인데"
"예. 처음에는 이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는 바람에 좀 더 고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위해 모습을 바꿨던 것 입니다."
"하아! 그랬었군요. 박산현령이라... 아! 소저의 아버님 시신은 어떻게 되었지요?"
"흑! 그것이..."
"말해 보세요"

한차례 눈물을 훔친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 묻혀 있을겁니다. 부탁이니 제 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하셔서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저기 아래라고 했죠? 그리고 소저를 그렇게 만든 그 인간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처벌이 반드시 내려질거예요. 그러니 소저도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아직은 아니예요. 그 놈들이 처벌 받는 것을 확인하기 전 까지는 편안히 눈을 감을수가 없어요"
"후! 그렇군요. 그럼 매소저의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예. 나소저 께서 수습하셔서 아버님 곁에 묻어 주세요"  
"알았어요. 지금 부터 할일이 많으니 소저는 잠시 쉬세요"
"예! 나소저! 부탁합..."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기의 형체는 초아가 기운을 거두는 순간 미처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다시 시신의 백회혈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화검수들의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걱정  마세요. 매소저! 그럼 매소저 아버님의 시신을 찾아 볼까"

그렇게 말을 남긴 설지는 잠시 전 여인이 말했던 곳으로 시선을 주며 기감을 확장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이미 백골화 되어 버린 여인의 아비 시신이 무당파 무인들에 의해서 수습되어 양지 바른 중턱으로 옮겨졌다. 뒤 따라 여인의 시신 까지 모두 옮겨 가매장을 끝낸 설지와 일행들은 후기지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하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무량수불! 신녀!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응? 아! 보표 아저씨. 글쎄요? 지금 생각중이예요. 청청 언니에게 맡겨 버리면 무지하게 쉽게 끝나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말을 하며 진초청을 돌아 보는 설지의 눈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초혜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진소청에게 모두 맡겨 버리라는 듯이...


"헤! 녀석, 그럼 안돼. 할아버지 말씀 벌써 잊었어? 우린 의원이야. 손속에 정을 두어야 한다고"
"그건 안 나쁜 사람들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이 놈들은 아주 아주 나쁜놈들이잖아"
"그래도 무력으로는 안돼 더구나 관이 개입된 일이기도 하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설지 언니 봉황옥패 안가져 온거야?"
"아니! 가지고 왔어, 그렇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처리하기는 곤란하잖아. 여하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알았어. 그냥 다 때려 부수는게 제일 쉬운데, 씨"
"호호호"

설지와 초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화지경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대화의 내용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에서 따라오는 소림사의 공각 스님에게 슬며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공각 스님! 저게 지금 무슨 말인게요? 말을 들어 보니 관의 개입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 한데..."
"허허, 모르셨군요. 성수신녀께는 하나의 신분이 더 있습니다."
"신분이 하나 더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미타불, 그렇지요. 우리 대정국의 공주 신분이시기도 합니다."
"뭐, 뭐요? 공, 공주?"
"예. 폐하 께서 공주마마의 신분을 보장하며 하사하셨던 봉황옥패의 현주인이 바로 성수신녀이십니다"
"허면, 명화 공주 마마께 하사하셨던 봉황옥패의 당금 주인이 성수신녀라는 말씀이신게요?"
"예! 그렇습니다."
"허허, 어쩐지 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했더니... 이거 우리도 조심해야 되겠소이다."
"아미타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후기지수들이 합류한 수색대는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배고프다고 투정하는 설지와 초혜 때문에 일행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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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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