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대단하다. 설지 언니, 괜찮아?"
"응! 난 괜찮아. 다친 사람 없지?"
"응! 다들 무사해. 저기 저 빨강이 아저씨는 넋이 나간 것 같지만..."

그랬다. 설지가 성수지환의 힘을 빌려 강시들을 공격했던 강기 다발에 강시는 물론이고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었지만 다행하게도 그 여파에 휩쓸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지의 공격을 두눈 멀쩡히 뜨고 지켜 보았던 혈사자 13호는 충격과 경악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강시들이 서 있었다고 짐작되는 자리를 향해 멍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사,사술이다. 으으으."

제 정신이 아닌 듯 몸까지 부들부들 떨어 가면서 읊조리듯 중얼거리는 혈사자 13호를 바라 보던 설지가 갑자기 오른 손을 들어 올려 허공 중에 휘저었다. 그러자 그때 까지 멍하니 서서 중얼 거리던 혈사자 13호가 마치 낚싯줄에라도 걸린 것 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켜 보는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듯 두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 잡고 발을 버둥거리는 혈사자 13호의 모습에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허공섭물 처럼 보이는 어떤 기운이 강한 압박으로 혈사자 13호의 목을 옭죄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기운의 시발점이 바로 잠시 전 설지가 허공 중에 손을 휘저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갑작스럽게 설지가 혈사자 13호를 자연지기를 이용해서 낚싯줄에 매달린 생선 마냥 허공 중에 매달아 버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평상시에 늘 웃고 다니면서 근심 걱정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는 철없는 아이 처럼 엉뚱한 행동을 일삼았던 설지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화가 난 이유는 설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곧 밝혀졌다.

"힘들죠? 이제 말해 보세요!"
"뭐,뭘 말이냐? 커컥"
"제가 지금 몹시 화가 난 상태지만 모르신다고 하니 다시 한번 묻죠. 제가 없애 버린 강시들 중에는 분명 아직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자! 이제 대답해 보세요.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주제한 주체가 누구죠?"
"뭐라? 설지야. 그게 무슨 말이냐? 어린 아이라니? 허면 방금 전의 강시들 중에서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더냐?"
"응! 철숙부! 키가 훌쩍 커서 어른 처럼 보였지만 분명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어. 기껏 해야 꼬맹이 도사 또래 정도나 되었을까?"
"허! 이런 개잡놈들이 있나. 아무리 사악한 놈들이라고 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강시 재료로 사용하다니..."
"자! 다시 시작해 볼까요? 강시를 제조하게 한 배후가 누구예요?"
"으으, 모,모른다"
"모른다고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말하세요. 누구예요?"
"커컥, 모,모른다. 차라리 죽여라"
"그래요? 아마도 지금 하신 말씀 곧 후회하게 될거에요. 죽는건 너무 편한 일이란걸 알게 될테니 말이죠. 제가 장담하죠"

한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한 음성을 토해낸 설지가 다시 한번 허공 중에 손짓을 하자 그때 까지 허공 중에서 대롱거리며 숨이 막혀 컥컥거리던 혈사자 13호의 입에서 인세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기이한 비명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저에서 배회하던 망령들이 공포에 질렸을 때나 터져 나옴직한 그러한 비명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휴! 시끄러!"

혈사자 13호의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비명 소리가 한참을 계속해서 이어지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그 소리가 영 못마땅했던 초혜가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지풍에 아혈을 격중당한 혈사자 13호의 입에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흘러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혈을 제압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골을 송연하게 했던 끔찍한 비명이 사람들의 귓전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한편 설지와 초혜의 이 같은 행동을 지켜 보고 있던 매화검수들은 또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철무륵이 날려 보낸 검강에도 아니 정확히는 도강에도 끄덕없던 강시들을 한꺼번에 날려 버린 강기 다발도 강기 다발이지만 거대한 체구의 장년인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 허공 중에 띄워 놓은 설지의 기이한 허공섭물 능력도 그에 못지 않은 충격을 매화검수들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매화검수 자신들도 검이나 찻잔 정도의 크지 않은 물체들이라면 얼마든지 허공섭물을 이용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체구의 장년인을 상대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자신들이 아는 허공섭물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작은 강아지 정도나 어떻게 해볼 생각을 품어 볼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어진 초혜의 지풍 역시 보기에는 간단해 보였지만 결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지의 자연지기에 의해 허공 중에 매달려 있긴 했지만 혈사자 13호의 신형은 자신을 핍박하는 기운 때문에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버둥거리듯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매화검수들이 보기에 아직 어린 두 여인의 기이한 능력이 이렇듯 자신들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이다. 한편 아혈을 제압당하고 나서도 일각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자 혈사자 13호의 상태는 입에서 침까지 줄줄 흘리면서 눈알이 거의 돌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혜아! 이제 그만 아혈을 풀어줘"
"응. 설지 언니"

대답과 함께 다시 초혜가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려 보내자 그제서야 혈사자 13호의 입에서는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다시 이야기 해볼까요? 누가 배후에요?"
"으으으, 혀,혈마님이시다"
"혈마? 철숙부, 혈마가 누구야?"
"응? 혈마라고? 글쎄다. 나도 처음 듣는 별호인데 혹시 누구 아는 분 있으시오?"

철무륵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철무륵과 마찬가지였다.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구나"
"이봐요! 혈마가 누군지 자세하게 말해봐요"
"으으으, 마,마교의 나찰마 비여홍님이 바,바로 혀,혈마님이시다"
"엥? 나찰마? 나찰마 그 덜떨어진 놈이 혈마라고? 크하하"
"철숙부, 왜 그래?"
"크하하. 그,그게 말이다. 비여홍 그 놈이 혈마라고 하니 우스워서 그런다. 그런 덜떨어진 놈이 배후라면 걱정할 것 없다."
"아이 참! 철숙부, 비여홍이 누구냐니까?"
"응! 아! 비여홍 그 놈은 무인이라기 보다는 사이한 대법에 정통한 놈이라고 할 수 있지. 하긴 그런 놈이니 어린 아이들을 이용해서 강시들을 만들 생각을 했겠지. 하여간 비여홍 그 놈이 마교에서 쫓겨나온 후 세웠다는 종파가 바로 혈교란다. 지난 십년간 잠잠하다 했더니... 가만 그러고 보니 혈사교와 혈교... 설지야 그 놈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보거라 아무래도 혈사교의 배후가 혈교 같구나"
"뭐? 혈사교? 들었죠? 철숙부의 말씀대로 혈사교의 배후에 혈교가 있었나요?"
"그,그렇다."
"허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허면 혈교가 그동안 벌인 모의들이 모두 비여홍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말인데... 이상하구나. 이상해"
"철숙부! 뭐가 이상한데?"
"흠, 그게 말이다. 오대세가에 마공을 전수하고 중소문파의 후계자들을 포섭하는가 하면 도강에도 끄덕없는 강시들을 준비한다라... 한번 생각해 보거라. 이건 보통 수준의 지략가 머리에서 나올만한 지략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알기로 비여홍 그 놈은 사이한 대법에는 정통해도 머리 쓰는데는 나만큼이나 젬병인 놈이거든"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걸까?
"글쎄다. 다시 한번 그 놈에게 물어 보거라"

철무륵의 말을 끝으로 혈사자 13호에게는 다시 끔찍한 고통이 찾아 들었다. 그리고 딱 죽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통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이 줄어드는 그 짧은 순간을 틈타 설지가 원하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한 혈사자 13호의 고통은 그로 부터 반시진 가까이나 더 지나서야 가까스로 멈춰질 수 있었다. 혈사자 13호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설지의 배려 덕택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저 놈도 강시가 백여구 넘게 만들어지고 혈사자들에게 고루 배분되었다는 것 외에는 혈교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게 없다는거군"
"그런가봐. 거짓말 하는 것 같진 않아"
"그렇다고는 해도 강시가 백여구가 넘는다니... 이제 부터 어떻게 할테냐?"
"어떻게 하긴 꼬리를 드러낼 때 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꼬리를 드러내는 그 순간이 혈교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될거야"

짐짓 주먹을 꼬옥 지며 표독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설지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지켜보는 철무륵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애잔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설지의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해주려던 철무륵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 위를 휘휘 살피기 시작했다.

"비아 찾아?"
"그래. 비아 그놈을 당장 산채로 보내야겠다"
"알았어! 비아 이리 내려와"
"저 놈은 어떻게 할거냐? 이 숙부가 묻어 버리랴?"
"아이 참! 묻기는 뭘 묻어. 단전을 부숴버린 후 일단 가둬 놔"
"그래. 그러자꾸나"

철무륵과 설지의 짧은 대화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일시에 바뀐 혈사자 13호였다. 한편 혈사자 13호가 날려 보냈던 전서구를 생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비아는 뭐 먹을게 없나 하는 생각으로 지상 곳곳을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살피다가 때마침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과일 나무 한그루를 발견하고 막 날아 내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찾는 설지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과일 하나를 먼저 먹고 갈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지만 비아는 이내 과일을 포기하고 설지를 향해 날아 내리기 시작했다. 공연히 성질 더러운 설지를 건드려 놓으면 그 보복으로 자신의 날개를 잘라 보자며 칼을 들고 덤벼들까봐 두려웠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고 단지 그동안 쌓인 돈독한 정 때문에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잠시 포기하는 비아였다.

"비아! 철숙부 산채 알지? 거기 좀 다녀 와. 이 서신 보여 주고 산적떼 아저씨들을 여기로 데려 오면 돼"

설지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발목에 가죽 주머니에 넣은 서신을 묶어 주자 비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 거렸다.

"한눈팔지 말고 빨리 다녀 와"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비아의 꼬리 쪽으로 설지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기며 따라 갔다. 그리고 까마득히 비상하는 비아를 바라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던 설지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비아! 산적 아저씨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게 조심해"


화살 처럼 날아가는 설지의 이 말이 비아에게 당도하는 순간 여유롭게 비행하던 비아가 갑자기 중심을 잃은 듯 휘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중심을 다시 잡은 비아는 빠른 속도로 하늘 저너머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비아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하고 날아가는 방향은 바로 성수의가가 자리하고 있는 귀주성의 귀양이었다. 바로 그 귀양에 녹림의 총본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설지의 얼굴에 떠올랐던 왠지 모르게 사악하고 장난스럽게 보이는 미소를 철무륵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비아의 뒷 모습을 쫓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소의 댓가로 녹림 총본산의 산적들 상당수가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들게 된다는 것을 철무륵은 지금 이 순간 미처 짐작 조차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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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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