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됐어?"

현청 지하의 은밀한 곳에 갇혀 있는 소녀들을 확인하고 돌아온 호아를 눈 높이로 들어 올린 초혜가 호아의 눈을 들여다 보며 하는 말이었다. 사실 초혜는 설지와 달리 아직은 호아와 서로 영성이 통하지 않아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대신 호아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행동 등을 통해서 호아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의외로 그 짐작이 대부분 정확하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현청 지하를 살펴 보고 돌아온 호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초혜는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심각한 일이야? 지금 돌아갈까?"

그러자 호아의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으로 봐서 이번에도 초혜의 어림짐작은 제대로 적중한 듯 했다.

"급한 일이야?"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호아의 모습을 본 초혜가 서둘러서 청진에게 전음을 날리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연대구품 까지는 아니지만 눈부신 속도의 경공술이 청진 도사를 향해 날려 보낸 전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초혜의 발 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청진 아저씨! 현청 지하에 심각한 일이 있나 봐요. 설지 언니에게 빨리 돌아가야 겠어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빠른 속도로 숙영지를 향해 사라져 가는 초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진 도사는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도 황급히 경공을 전개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박산현의 시전에서는 한동안 약초 채집상인 아리따운 미녀를 둘러싼 엉뚱한 소문 하나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약초꾼들이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서 입산할 때는 반드시 산신령에게 이를 고하는 제를 먼저 올리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는데 미녀 약초 채집상은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입산하여 영초들을 마구 캤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를 목도한 젊은 산신령이 대노하여 그 미녀를 혼내주기 위해 몸소 시전으로 내려 왔다는 것이 소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한동안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즐겁게 만드는 작은 사건이었다.

한편 초혜가 부리나케 숙영지로 돌아 오던 그 시각에 설지와 진소청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서 여염집 규수들이 그러한 것 처럼 담소를 나누며 과일들을 다듬고 있었다. 성수신녀가 과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작은 양이지만 과일 한두알 정도를 들고 찾아오는 병자들이 꾸준히 늘어 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인 과일들의 양이 제법 되었던 것이다. 그냥 두면 상해서 버려야 했기에 지금 설지와 진소청은 과일들을 다듬어서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설지가 조신하고 예쁘게(?) 과일의 껍질을 깎아낸 후 얇게 썰어서 건네주면 진소청은 이를 건네 받아서 열양지기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말린 과일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만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이 아리따운 두 여인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소담스럽고 평화로운 정경을 지켜 보는 일성 도장의 얼굴에서는 따뜻한 미소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허허! 녀석들, 저렇게 보니 영락없는 여염집 규수들의 모습이로구나."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정경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초혜의 커다란 목소리가 소담스럽고 평화롭던 정경을 산산히 흩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설지 언니, 설지 언니이~"
"응? 저 녀석, 왜 저래?"

과일을 깍다 말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설지는 자신을 향해 헐레벌쩍 달려 오는 초혜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헥헥! 그러니까, 그게... 헥헥... 호아에게..."


거기 까지 말한 초혜가 한숨을 돌리는 사이 설지는 호아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듣기 시작했다. 호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록 부드러웠던 설지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변해가자 그 같은 모습을 지켜 보던 일성 도장과 호걸개도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하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설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잠시 동안 서로 전음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열린 설지의 입을 통해서 전말을 듣게 되자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초혜를 돌아 보았다.

"뇌옥이라고 했더냐?"
"예. 현청 내부를 살펴 보던 중에 지하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어서 살펴 보니 작은 공간 같은 것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어요. 그래서 전 뇌옥이라도 있는 줄 알고 청진 아저씨께 여쭤 보니 금시초문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작은 공간 속에 이질적인 기운이 여러개 감지되었는데 지금 설지 언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기운들이 바로 갇혀있는 소녀들인가 봐요"
"허! 이런 일이, 백성들을 돌봐야 할 관청에서 사사로이 어린 소녀들을 사육하듯이 가둬 두고 있었다니... 이를 어찌해야 하나. 무량수불!"
"아미타불!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 소녀들을 구할 방법은 없는 것이 아닌지요?"
"무량수불! 그러니 하는 말이오. 관청을 무림인들이 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지,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먼저 소녀들을 구해야죠.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해요"
"네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다만 신중해야 한다. 관과 무림의 관계를 생각하더라도 섣부른 판단과 행동은 득이 되질 않아"
"알아요. 도사 할아버지. 음...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도사 할아버지는 한발 물러나 계세요"
"허면, 어찌 할 생각이더냐? 너희들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텐데 말이다."
"장포두 아저씨!"
"예! 마마!"
"봉황옥패의 권한으로 무림인들을 관인으로 기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나요?"
"아닙니다. 마마! 원하시면 일만의 관군 까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음... 그렇다면... 도사 할아버지!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 도움을 받을수 있을까요?"
"후기지수들을?"
"예. 그들을 임시 관인으로 기용해서 이번 일을 처결할까 해서요. 아무래도 각 문파의 중진들 보다는 후기지수들의 참여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후일의 파장에 대비하기 쉽지 않겠어요? 물론 억지로 권유할 생각은 없어요"
"흠, 기다려 보거라. 각 파의 의견을 취합해 보마. 아! 그리고 우리 무당에서는 청진과 현진을 보내 줄테니 데려가도록 해라"
"아미타불! 우리 소림에서도 공각을 데려가시지요"
"호호 고마워요. 도사 할아버지, 스님 할아버지"
"아미타불! 별 말씀을..."

소림사와 무당파에서 이번 일에 합류하기로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자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나머지 구파일방에서도 설지의 뜻대로 이번 일에 후기지수들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림 역사상 초유의 관청 습격(?) 사건이 박산현청에서 그 회려한(?) 막을 올리게 된다. 한편, 마화수송단의 숙영지에서 관청 습격 작전이 논의 되고 있던 그 시각 박산현청 내부의 한 전각 안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위와 완벽히 차단되고 경계를 서는 관군들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는 전각 안에서는 해가 떨어지기도 전인 지금 술판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커다란 술상에 둘러 앉은 대여섯명의 사내들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권커니 잔커니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그 광경은 얼핏 보기에 주지육림의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주지육림의 한켠에서는 흥겨운 술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광경 하나가 펼쳐지고 있었다.

벌거벗은 사내들 대여섯명이 한데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용도인지 모르지만 가는 채찍을 든 사람도 있었고 회초리 처럼 보이는 가는 나뭇가지를 손에 든 사람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벌거벗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들의 중심에는 또 다른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녀였다. 박산현령의 첫째 아들인 서리태에게 목이 묶인 채 끌려 나갔던 어린 소녀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있게 된 소녀를 대하는 사내들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참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면서 소녀를 유린하는 사내들에 의해서 소녀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으며 그저 생명이 없는 인형 처럼 흔들면 흔드는대로 나약한 몸을 맡기고만 있을 뿐이었다. 온 몸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아가면서 유린당하고 있는 소녀의 눈에서는 초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 누군가 지켜 보고 있었더라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소녀의 주위에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저 광분한 짐승들 몇마리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점점 흐려져 가는 시선 속에서도 속으로는 누군가를 향해 간절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소녀에게 그 순간 기적이 찾아 왔다. 돌연한 굉음과 함께 전각의 한쪽 벽이 터져 나가더니 그 자리를 일단의 사람들이 무거운 걸음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작 연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7  (0) 2013.06.30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6  (0) 2013.06.16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5  (0) 2013.06.09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4  (0) 2013.06.02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3  (0) 2013.05.26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2  (0) 2013.05.19
Posted by 까만자전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