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야 되었다. 각 문파에서 후기지수들을 데려가는데 다들 동의하는구나."
"잘 됐네요. 도사 할아버지! 그럼 당장 출발할거니까... 음...음... 청진 아저씨가 준비를 서둘러 주세요."
"무량수불! 그리하지요"
"흠,후기지수들을 데려가는 문제는 해결되었다만 정말 너희들만으로도 괞찮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장포두 아저씨 일행도 함께 갈거니까 곤란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거예요"
"그렇기는 하다만..."
"어르신 걱정마십시오. 제가 함께 다녀오지요"
"응? 철숙부가? 거긴 관청인데?"
"크하하! 더욱 잘된 일 아니더냐. 산적 놈 주제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고개를 뻣뻣이 들고 관청에 들어가 보겠느냐."
"그건 그렇네. 호호"
"그럼 그렇게 하시게. 아무래도 아이들만 보내려니까 걱정이 되었는데 잘 되었구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인물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바로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이었던 것이다. 유도옥의 의중이 무엇이든 화산파 장문인의 신분으로 어쩌면 관과 충돌할지도 모를 일에 함께 한다는 것은 절대로 가벼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었다.

"허! 장문인께서 직접 가시겠다고?"
"예. 도장 어르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게. 장문인의 신분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판단하지는 않았겠지만 심사숙고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걸세"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단, 화산파에 피해가 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장문인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문인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밖에서 보는 시선은 또 다르다는걸 잘 아시지 않는가?"
"도장 어르신이 염려하시는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번 일은 아무리 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에는 그 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도를 추구하는 우리들이 양민들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는 것도 도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더는 내 말리지 못하겠구먼, 설지야! 네 생각은 어떻더냐?"
"호호! 제가 간단하게 해결해 드릴게요"

"엉? 간단하게 해결한다고? 어떻게 말이더냐?"
"장포두 아저씨! 공증을 서 주세요."
"예. 마마."
"음. 그럼... 지금 부터 본녀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을 한시적으로 성수신녀의 보표로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끝날 때 까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도록 하세요"

다소 뜻밖의 말이 설지의 입에서 흘러나와 지켜 보는 사람들의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뜻을 헤아린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은 자신의 옷가지를 여민 후 설지를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원시천존!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이 공주마마의 명을 받습니다"
"호호호! 도사 할아버지, 어때요?  간단하죠?"
"허허. 그 참."

공식적으로는 성수의가의 숙영지인 박산현에서 실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봉황옥패의 패주이며 대정국의 공주 신분인 나설지에 의해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이 한순간에 보표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 날의 일은 호사가들에 의해 강호로 퍼져 나가며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를 즐겁게 만들어주는데 큰 몫을 하기도 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보표로 전락한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과 철무륵을 좌우에 거느린 설지는 각파의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아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는 모두를 임시 관인으로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숙영지를 출발한 설지와 임시 관인들은 채 일다경도 지나기 전에 박산현청의 커다란 정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한편 박산현청의 정문을 지키고 서 있던 관병 두 사람은 무인들로 보이는 이들 여럿이 한꺼번에 다가오자 바짝 긴장하여 손에 든 창을 더욱 힘있게 쥐고는 다가오는 무리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두 사람의 눈에 관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 여럿이 무리에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들어 왔다. 관인과 무림인이 함께 다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정작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다가오던 무림인 중에 두 사람이 대열에서 빠져 나와 선두로 나오더니 순식간에 자신들 앞에 당도하여 마혈을 제압해 버렸던 것이다.

"으으... 이, 이 무슨... 우리는 관병이오"
"잘 알고 있다. 본관은 기찰 포두 장학일이라고 한다. 소란떨 것 없으니 얌전히들 있거라"
"추,충!"

황당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포에 사로잡힌 관병 두 사람 중 한사람의 입에서 두려움 섞인 말이 흘러 나오자 무리 중에서 관인 복장을 하고 있던 이가 걸어 나오면서 하는 말이었다. 지방 현청의 일개 관병이 기찰 포두의 일에 무어라 관여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던 관병은 억지로 용기를 내서 쥐어 짜듯이 말을 이었다.

"대,대인, 허면 신분패를..."
"그거라면 여기 있다. 그리고 제압된 마혈을 풀어 줄테니 이 시각 이후로는 그 누구도 현청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할 수 있겠느냐?"
"추,충!"

제압된 마혈이 풀리는 동시에 신분패를 확인한 관병이 부동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두고 일단의 무림인들과 관인들은 현청의 문을 열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의 세 여인을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현청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짝 얼어 있던 관병은 누군가 다가와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들기는 것에 정신을 차리고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헌데 손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관병은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이 들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활활 타는 듯한 눈동자를 가진 강인한 인상의 그는 다름아닌 철무륵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다는 듯 관병의 볼을 톡톡 두들겨 주고는 정문을 넘어서 휘적휘적 안으로 사라져 가는 철무륵의 뒷 모습에서 어딘가 통쾌해 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호아! 이 쪽이 맞아?"

마치 기습이라도 하는 듯이 현청으로 들이 닥친 설지와 임시 관인들은 가장 먼저 호아가 확인했던 지하 공간에서 소녀들을 구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일행들이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숨겨진 전각을 찾아내고 막 들어 서려던 순간 설지가 급히 일행들의 걸음을 붙잡았다.

"모두 잠깐만요."
"응? 왜 그래? 설지 언니"

대답 대신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설지의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였다. 현청으로 들어서면서 부터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살피고 있던 설지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자리잡은 한 전각의 내부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잡혔던 것이다. 거기다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진 기들이 어지럽게 마구 엉켜 떠다니는 그 곳에서 흘러 나오는 기운은 현청이라기 보나는 주루의 분위기에 더 가까워서 설지를 자극했던 것이다.

"저쪽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
"응? 설지 언니, 저쪽은 왜?"
"저기 외진 곳에 보이는 전각에서 지금 난잡한 기가 흘러 나오고 있어. 대낮임에도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애"

그렇게 말하면서 설지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뒤이어 진소청과 초혜가 급한 걸음으로 따라 붙었다. 엉겁결에 방향을 돌리게 된 임시 관인들도 그런 설지의 뒤를 따라 전각을 향해 우르르 몰려 갔다.

"가만 그런데 이거 문이 어딨는거야?'
"설지 언니, 비켜 봐! 내가 열어볼게"
"혜아 네가?"
"응!"

배시시 웃으면서 초혜가 작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초혜의 작은 주먹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지켜 보는 이들의 착각이었을까? 작은 주먹을 들러 올렸던 초혜가 심호흡을 한번 거창하게 하더니 공간을 격하고 전각의 벽을 향해 주먹을 힘차게 내뻗었다. 하지만 그뿐 초헤의 주먹에서 권강이라던가 권풍이라던가 하는 특이한 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화산파의 후기지수들인 목자성과 자인걸은 초혜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서로를 바라 보았다. 헌데 그 순간 갑작스럽게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초혜가 주먹을 뻗었던 방향에 자리한 전각의 벽이 그대로 터져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일에 지켜 보는 후기지수들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각의 벽이 터져 나가고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전각 내부의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을 목도한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분노를 키워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냉기를 풀풀 날리며 검을 빼든 진소청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져나간 벽을 넘어 전각 안으로 들어선 진소청의 검이 울었다. 마치 호곡성 같은 기이한 울음을 한차례 터트린 진소청의 검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처참한 비명과 잘려 나간 수족들이 뿌려지는 피와 함께 어지러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혜아! 청청 언니 말려. 저러다 다 죽이겠어"
"응! 설지 언니"

대답한 초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살풍경이 그려지고 있는 전각 안으로 들어 섰다. 헌데 초혜의 다음 행동이 기이했다. 설지의 말을 듣고 진소청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진소청이 베고 지나간 사람에게 다가가 웃는 얼굴로 어처구니 없는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 어머! 아프세요. 호호.. 이야! 이거 무지하게 잘 잘렸다. 어때요? 아픈 줄도 모르겠죠?... 호호호. 어머. 신기해라. 어떻게 이리도 깨끗하게 자를 수 있지?"

싸늘한 한기를 발산하며 전각 내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던 사내들의 수족 하나씩을 거침 없이 잘라 버리는 진소청과 그런 진소청을 말린다는 명분으로 뒤를 따라 다니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어처구니 없는 말을 늘어 놓는 두 여인의 행동에 후기지수들은 할말을 잃어 버렸다. 그런 두 여인을 지켜보는 유도옥의 시선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 도사 현진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소요...나...찰"
 
 이 날의 일로 진소청에게는 손속에 자비가 없다는 의미로 냉수무정이라는 별호가 붙게 되며 웃는 얼굴로 잘려진 사람들의 수족을 들고 자세히 관찰하던 초혜에게는 소요선자라는 별호가 붙게 된다. 물론 사마외도들에게는 소요선자 대신 소요나찰이라는 별호가 초혜의 이름 앞에 붙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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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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