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더욱 기이한 것은 그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 묘연하다는 것일세"
"묘연하다고요?"
"그렇다네. 어떤 문제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날 한시에 그 유적에 거주하던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다는 말일세. 가재도구는 물론이고 귀중품 조차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어떤 힘이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짐작만 하고 있을 따름이라네"
"햐! 신기해, 신기해!"

"그럼, 성수지환이 제석천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예요?"
"아! 그렇군,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빼 먹었네, 그려. 이래서 사람은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그러는가 보군, 허허"
"호호! 별 말씀을 다 하세요"
"허허허, 그러니까, 그 성수지환을 연구하기 위해서 후대의 천마들이 숱한 시간을 들였다고 내가 이야기 했었지 않는가?"
"예! 교주 할아버지"
"허허허, 그 할아버지라는 서리는 들을 수록 좋구만"
"앞으로도 쭉 그렇게 불러드릴게요. 호호"

"허허허. 그렇게 해주게. 늘그막에 호강하는구만, 자!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그렇지. 그러니까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네. 왜냐하면 그 유적에 대해서 알수 있는 기록이나 책자가 전혀 발굴되지 않았거든, 단지 유적의 중앙에 위치한 신전으로 보이는 건축물에 새겨진 생생한 조각들을 통해서 사라지기 전 유적의 주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네"
"여기서 그런데가 나오는게 맞죠? 그렇죠? 헤헤"

초혜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던 혁련필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허허허, 맞네! 그런데 지금으로 부터 약 삼백년전에 그러니까 성수의가가 막 중원에 등장할 때랑 비슷한 시기였을거네. 그 때쯤에 드디어 새로운 유물 하나가 그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네. 다름아닌 한폭의 그림이었지"
"그림이요? 혹시 그 그림이..."
"맞네. 신녀의 짐작대로일세. 그 그림은 어떤 의식을 진행던 것으로 여겨지는 제단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인데 화폭의 폭은 넉자 정도 되고 길이는 일곱자 정도의 크기였다네. 기름 종이로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던 화폭을 살펴본 결과 오른 손에는 뇌전으로 만든 창이 들려져 있었고 왼손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구름이 들려져 있는 바로 그 제석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네"

"하지만 그림만으로는 제석천과 성수지환의 연관이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허허허! 더 들어보게. 그림 속의 제석천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오른 손에 비환 하나를 차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지. 당연히 우리 신교의 모든 관심은 그림 속의 비환에 집중되었다네. 그리고 우리 신교에 전해지는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들의 말들을 종합해 본 결과 그림 속의 제석천이 차고 있는 비환이 바로 초대 천마가 지니고 있던 문제의 비환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네. 그리고 오늘 자네가 차고 있는 성수지환을 살펴 보니 그 결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네"

"우와. 우와! 그럼 설지 언니가 제석천의 신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잖아"
"아니, 그래도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허허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그런데 말일세. 그림의 뒷쪽에서는 유적의 주인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네. 그림과 더불어 문자 기록이 처음 발견됨으로 해서 당시의 천마와 천마신교에서는 어렴풋하게 나마 유적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가 있었던 거라네."

"그림의 뒷쪽에서 발견된 기록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데요?" 
"흠, 그러니까 제석천도의 뒷쪽에는 앞쪽의 그림을 설명하는 내용과 더불어 자신들이 제석천을 섬기는 부족이었다는 것과 일상 생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네. 비환과 제석천도의 연관은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성수지환이 바로 제석천이 패용하고 있던 바로 그 비환이라는 것과 비환을 얻는 자가 순, 폭, 염, 환, 신의 다섯 단계를 거치게 되면 마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짧지만 선명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기도 했었네. 자네에겐 안타깝겠지만 그 비환의 용도에 대한 다른 구체적인 언급은 더 이상 없었다네"

"햐! 신기해! 그럼, 설지 언니가 지금 까지 순과 폭을 이끌어 냈으니까 앞으로 세 단계만 더 건너 뛰면 성수지환의 이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는 거네요?"
"그렇지! 바로 그런 이야기일세"
"설지 언니, 어때?"
"응? 뭐가?"
"제석천의 신물이라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아! 호호. 그냥 그래"
"뭐야. 이 반응은?"
"글쎄. 아직은 얼떨떨하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느낌이야"

"허허허. 그럴걸세. 제석천의 신물이라는 것을 선뜻 믿기에는 그리 쉽지가 않겠지. 그나저나 이거 너무 우리끼리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먼, 어떤가 신녀께서 함께 오신 다른 분들을 내게 소개시켜 주지 않을텐가?"
"어머! 내 정신 좀 봐! 호호, 죄송해요. 교주 할아버지. 소개시켜 드릴게요. 이쪽은 제 숙부이시고 저기 저 분들은 무당십이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세요"
"안녕하쇼! 녹림 총표파자인 철무륵이라고 하외다"
"허허허! 반갑소이다. 말로만 들었던 총표파자를 뵈오니 한갖 소문의 쓸데 없음이 실감나는구료"
"크하하! 교주 께서 과찬이 심하십니다."
"허허허. 아니외다"
"무량수불! 무당의 청진이 천마신교의 교주를 뵙습니다"
"허허허! 반갑네. 자네가 근래에 사해 까지 명성이 자자한 청진 도사였구만"
"무량수불"

천마신교 교주 혁련필의 극찬에 잠시 얼굴의 혈색이 상기되는 듯 했던 청진 도사가 이내 신색을 바로 하고 도호로 대답을 대신 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초혜의  말에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는 청진 도사였다. 추락하는 도사에게는 당연히 날개가 없었다.

"헤헤헤. 교주 할아버지,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청진 아저씨는 설지 언니 보표에요. 보표!"
"보표?! 허허허! 그러신가? 당대 최고의 무인을 보표로 거느리다니 신녀답구만"
"헤헤헤. 그렇죠?"

천마신교의 교주를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대하듯이 너무도 편하게 대하는 설지 일행을 보면서 흑룡대주 추자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교주의 부상 때문에 성수신녀 일행을 초빙해 오기는 했지만 천마신교 교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교주를 대하는 설지 일행의 행동이 너무도 가볍고 거기다 불경스럽기 까지 했던 것이다. 흑룔대주 추자의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초혜는 그 가벼운 입을 쉴 새 없이 놀려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설지 언니에게는 아주 귀여운 제자도 있어요"
"응? 제자가 있다고? 벌써 말인가?"
"호호.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교주 할아버지도 아시는 사도세가의 연이라는 아이가 제 제자예요"
"사도세가! 허면 사도세가에 생존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어머! 교주 할아버지도 사도세가에 닥친 일을 알고 계셨어요?"
"알다 뿐이겠는가, 천마신교에 난입해서 나를 이 꼴로 만든 종자가 혈교의 무리들을 이용해서 사도세가의 멸문을 주도했다는 내용을 보고 받았다네"
"그러셨군요. 맞아요. 사도세가에서는 그때 단 두 사람만이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 남았어요. 바로 사도세가의 장자인 사도청 소협과 동생인 연이가 그들이죠."

"사도세가의 멸문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신녀의 제자라는 그 아이는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구먼, 어떤 아이길래 신녀가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말일세"
"호호호, 아직은 어리지만 제지가 넘치는 총명한 아이예요."
"물론 그헣겠지. 저기 다가 오는 저 일행에 함께 있는가?"

설지와 일행들이 혁련필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마화 이송단은 벌써 그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응? 이 기운은... 허허허, 일성 도장도 함께 계시는가?"
"어머! 도사 할아버지랑도 인연이 있으세요?"
"허허허. 그렇다네 젊은 날의 한때에 잠시 부딪쳤던 적이 있었다네."
"그러셨군요"

한편 마화이송단의 선두에서 일성 도장의 품에 안긴채 일성 도장의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장난을 치던 사도연은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은신해 있는 숲 가까이로 도착하자 내려 달라는 듯 갑자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허허! 왜 그러느냐?"
"도사 할아버지. 저 내려 주세요. 언니에게 갈래요"
"설지에게? 그럼 내려올 것 없다. 이 할애비와 함께 가보자꾸나"
"정말요?"
"그럼. 혼자 가기 보다는 이 할애비랑 같이 가는게 더 좋지 않겠느냐?"

일성 도장이 이렇게 이야기 하자 버둥거리는 것을 멈춘 사도연이 다시 일성 도장의 품에 폭 안겨 들었다.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그런 사도연의 등을 두어 차례 쓰다듬어 준 일성 도장은 곁에 있던 혜명 대사와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으니 아이들에게 짐을 풀게 하고 우리는 함께 가 봅시다"
"아미타불"
"예. 원시천존!"

혜명 대사와 유도옥의 손짓에 따라 갑자기 부산해진 마화이송단을 뒤로 남겨 두고 세 사람은 천마신교도들이 은신해 있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막 세 사람이 숲으로 들어설 무렵 작은 그림자 하나가 세 사람의 뒤를 바짝 따라 붙으며 함께 숲으로 사라져 갔다. 그 작은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현진 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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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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