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손 안에서 기분 좋은 검명을 토해내는 묵혼과 그런 묵혼을 신기하게 바라 보는 사도연을 번갈아 바라 보면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인 설지가 마침내 무척이나 오랜만에 묵혼이라고 이름 붙이고 묵아라고 부르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가볍게 빼들었다. 그리자 다음 순간 지켜 보던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묵아의 거무튀튀한 검신에서 시리디 시린 예기가 사방으로 쭉 퍼져 나가는 모습을...

"으헉!"

묵아의 날카로운 예기에 깜짝 놀란 초록이 두자성의 비명성을 뒤통수 후려갈기기 신공 한방으로 제압한 철무륵은 조용히 하라는 듯 인상을 팍 구기며 두자성을 노려 보았다. 아마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데 모여있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몇몇은 묵아의 예기를 접하고 깜짝 놀라서 터져나오려는 비명성을 다급하게 삼켰을 것이다. 또 개중 몇몇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 막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여간 기분 좋은 검명과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었던 묵아의 거무튀튀한 검신은 햇빛을 받자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작은 떨림을 발하면서 오랜만에 세상 바깥으로 나온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묵아의 기분이 좋은가 봐?"

사도연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웅"하는 짧은 검명을 토해내는 묵아의 검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설지의 표정에서도 반가움과 기분 좋은 흐뭇함이 함께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묵아를 잊고 있었던 것이 미안하게 느껴지는 설지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원의 신분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는 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적잖이 안도가 되기도 하는 설지였다.

영수의 제왕인 용의 원정 내단을 가리켜 사람들은 흔히 여의주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그 용의 여의주가 검의 손잡이인 검파에 박혀있는 묵아를 가볍게 거머쥔 설지는 미안한 마음을 잠시 뒤로 하고 허공을 향해 좌우로 한차례씩 휙휙하고 묵아의 검신을 휘둘러 보았다. 오랜만의 칼질(?)임에도 손에 착착 감겨드는 느낌이 너무도 좋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역시 명검은 명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만족의 뜻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베어 무는 설지였다.

헌데 다음 순간 설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예측 불허의 행동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하였다. 느닷없이 이상한 동작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가 하면 좌우로 빙빙 돌리기도 하고 양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는 황당한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지 언니! 지금 뭐해?"

"뭐하긴, 준비 운동하잖니"

사람들의 의문을 대신한 초혜의 질문에 황당한 동작 만큼이나 황당한 대답을 하는 설지였다.

"준비 운동이라고? 그게?"
"응! 왜?"
"그냥 진기를 끌어 올려서 사지 백해로 퍼트리면 되는거 아냐?"
"어머! 얘는 무슨 그런 말을, 늙어서 팔다리가 쑤시지 않으려면 움직이기 전에 준비 운동을 잘 해야 하는거야, 연아도 내 말 잘 새겨 들어, 알았지?"
"네~"
"하여간 특이해, 특이해!"

특이하다는 초혜의 말대로 특이한 모습으로 준비 운동을 모두 마친 설지가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윽고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가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이어서 묵아의 검파를 눈 높이 조금 아래 까지 끌어 당겨 올리는 설지의 모습에서 지켜 보는 많은 이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행여나 놓칠세라 설지의 동작 하나 하나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에 어리기 시작하는 긴장감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소리 하나가 장내를 휑하니 스치고 지나 갔다. 

"잠깐, 잠깐! 설지 언니, 그거 하려는거 아니지? 그렇지?"

하필이면 그 순간에 다급히 터져 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초혜였다. 아마도 초혜의 이 말만 없었다면 더욱 좋은 장면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응? 뭘?"
"아이 참! 그거 말이야, 그거, 사랑과 협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거"
"아! 호호호, 당연히 해야지"
"제발 좀 참아 주라, 설지 언니. 주위를 한번 봐봐, 지켜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꼭 그걸 해야겠어?"
"초혜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아! 그런게 있어. 설지 언니가 검만 들면 늘 하는 괴상망칙한 버릇"
"괴상망칙한 버릇이라고?"
"그래!"

초혜가 이 처럼 사도연의 질문에 잠시 시선을 뺏긴 사이에 설지는 묵아를 들어 올린 후 기어코 초혜의 우려를 가볍게 배반하고 예의 괴상망측한 구호를 오늘도 재연하고 있었다.

"사랑과 협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유치찬란하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설지의 이 외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종류였다. 초혜를 비롯한 몇몇은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지를 바라 보았으며 후기지수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왁자하니 웃음 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치찬란한 구호를 뱉어낸 설지는 사람들의 반응 같은 것은 가볍게 무시하고 부드러운 흐름을 유지하면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지가 이 처럼 본격적으로 검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웃음 소리 등으로 인해 소란스럽기만 했던 장내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간간히 설지가 휘두르는 묵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사람들의 귓전을 두드릴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흘러가도 설지의 검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단지 부드러운 호선과 직선의 궤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검무를 추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혜와 진소청, 그리고 철무륵과 일성 도장 등의 절대 고수들 몇몇만이 설지가 휘두르는 묵아의 궤적에서 놀라운 무공의 묘리를 발견하고 간간히 낮은 감탄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후기지수들의 시선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일부 후기지수들은 뚜껑을 열고 보니 막상 기대했던 것 보다 볼것이 없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리며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지켜 보는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 설지의 아름다운 검무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설지가 단순하게 휘두르는 묵아의 궤적을 따라서 형형색색의 작은 강기 꽃들이 하나, 둘 허공으로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허공 중의 보이지 않는 그물에 갇혀있는 강기 꽃들을 묵아로 끄집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묵아의 검신이 지나간 허공에서는 예외 없이 무수한 강기 꽃이 형성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설지가 휘두르는 묵아의 궤적을 따라서 점차 더 많은 강기 꽃들이 생성되었으며 그렇게 생겨난 강기 꽃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허공을 가득 메운 채 가벼운 물살에 몸을 맡긴 듯이 잔잔히 흔들리면서 움직이고 있는 강기 꽃들은 시시각각으로 그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허공을 물들이는 무수한 강기 꽃들과 그 강기 꽃 아래에서 화려한 검무를 추는 설지의 모습에서는 성스러운 분위기 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른바 완벽한 강기성화에 다다른 무인의 모습을 설지는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설지의 모습을 바라 보면서 초록이 두자성 처럼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이가 장내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춤을 추는 듯 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던 강기 꽃들이 퍽하고 소리를 내면서 일시에 터져 나가는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더니 이내 작는 꽃잎들로 화해 주위로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설지 주위 사방으로 꽃비가 내리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와! 예쁘다"

사도연이 발하는 감탄성 처럼 인세에 보기드문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 사람들의 시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 내리던 꽃비 가운데 일부가 마치 무엇에라도 이끌리는 듯 사도연이 있는 쪽으로 갑자기 쭈욱 흘러 가는가 싶더니 작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폭포수 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졸지에 강기로 만들어진 꽃비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게 된 사도연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장 먼저 경악하는 이는 다름 아닌 초록이 두자성이었다.

"저,저, 위,위험합니다요"

두자성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비단 두자성 뿐만 아니라 뒤늦게 실태를 깨달은 후기지수 몇몇도 다급한 외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강기가 무엇이던가? 닿는 족족 파괴해 버리는 무자비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강기가 아니던가? 그런 강기가 하나 둘도 아니고 꽃비 모양으로 화해 작은 사도연의 몸을 적시기 직전이었으니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두자성의 다급한 외침은 다시금 이어진 철무륵의 뒤통수 후려치기 신공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시끄럽다. 이 놈아! 예쁘기만 하구만"
"예? 초,총표파자님..."
"호들갑 떨지말고 가만히 보기나 해라, 이 놈아"


철무륵이 보여주는 뜻밖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두자성의 눈에 막 강기 꽃비에 적셔지는 사도연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잠시 뒤에 벌어질 참사를 생각하며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한 두자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눈을 감은 두자성은 곧이어 몸서리 처지는 작고 여린 비명성이 장내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비명은 커녕 사도연의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음성만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야! 정말 예쁘다. 설지 언니, 이거 만져 봐도 돼"
"그럼! 마음 껏 만져 봐"
"헤헤. 정말 신기해"

무슨 일인가 싶어 실눈을 살짝 뜬 두자성의 눈에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빙글 빙글 돌면서 강기 꽃잎을 잡아 나가고 있는 사도연의 모습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무인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약 일각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자 허공을 수놓으며 쏟아져 내리던 수많은 강기 꽃비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순식간에 모두 자취를 감춰버리고 장내는 평소와 다름 없는 평범한 풍경으로 바껴 있었다.

"연아, 어때?  에쁘지?"
"응! 무지 무지하게 진짜 진짜 예뻐"
"호호호! 무식한 권법 같은 것 보다 훨씬 낫지? 그렇지?"
"응! 난 무식한 태극권말고 설지 언니의 그 예쁜 검법 배울래"

무당파의 잘나가는 태극권이 황당한 사제지간에 의해서 여러 차례 무식한 권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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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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