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청 언니!"
"예. 아가씨"
"저 사람들 근맥을 모두 잘라 버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시리딘 시린 예기를 발산하는 자신의 검을 빼든 진소청이 움직였다. 하지만 마혈이 제압당해 있던 파락호들이나 허공에서 고통에 겨워하는 파락호들 모두 그런 진소청의 모습을 육안으로 제대로 식별 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무언가가 자신들의 눈 앞을 휙하고 지나갔다가 곧바로 제자리로 되돌아 갔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세 명의 파락호에게서 일어난 변화는 명백했다.

미처 움직임을 따라 잡지도 못하는 사이에 세 명 모두 근맥이 절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파락호들 모두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얼굴에 떠올릴 때 한쪽 옆에서는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화산파 장문인 유도옥이 고개를 내저으며 혜명 대사에게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 원신천존! 대사,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오이까?
- 아미타불! 허허허, 그렇게 보이시오?
- 허면 대사의 눈에는 한낱 파락호들에게 저처럼 독하게 손을 쓰는 성수신녀의 처사가 거슬리지 않는단 말이오?

- 허허허, 불제자의 몸으로 왜 거슬리지 않겠소이까? 허나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려

- 그 말씀은...

- 아미타불! 장문인께서도 전대 성수신의가 비명횡사한 것을 알고 계시지요?
- 그렇소이다만?

- 당시 그 일이 벌어질 때 눈 앞에서 부모님을 잃었던 어린 성수신녀께서는 정신을 놓아 버렸으며 한때 사경을 헤맸다고 하더이다. 그런 신녀를 애타게 지켜 보던 신녀의 할아버님과 숙부 께서 다짐을 했다고 하지요. 성수의가에 위해를 가하는 자가 개인이면 개인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고 방파 소속이면 방파에 소속된 모두에게 단호하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원흉이었던 혈사교가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멸문한 것이 그 시작이었소이다.
- 원시천존! 

명문 정파의 일원이자 화산파 장문인인 유도옥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하게 보이는 설지의 처사였다. 허나 혜명 대사의 설명을 하나씩 듣고나자 할 말이 없어지는 유도옥이었다. 종과득과(種瓜得瓜)요 종두득두(種豆得豆))라고 했다. 거친 무인들이 횡행하는 강호 만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이 통용되는 곳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눈 앞에서 무도한 자들에게 부모를 잃은 이의 심정을 뉘라서 쉬이 짐작하겠는가?

그렇게 유도옥의 머리 속은 여러가지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었다. 인명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들이 속한 도가에서는 인간의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타락과 무지의 근거를 찾아서 척결하고 한편으로는 자연의 실상을 깨달은 참지혜를 통하여 무위의 삶을 추구하는 무위자연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도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다 사라져 가기도 했다.

설지의 처사를 지켜보며 혜명 대사와 몇마디 전음을 나누는 과정에서 찾아온 작은 깨달음의 불씨가 그렇게 유도옥의 머리 속에서 막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허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었든 듯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유도옥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애걸하는 듯한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경동각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시오"

파락호 세 명의 근맥이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설지가 나머지 파락호들 모두에게 손을 쓰기 전에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경동각을 발견하고 마혈과 아혈을 먼저 풀어주었다. 그러자 깊은 숨을 한 차례 들이쉰 경동각이 무릎 걸음으로 빠르게 설지를 향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면서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잡힐 듯 했던 작은 깨달음의 단초를 다시 놓아버린 유도옥은 아쉬움을 삼키면서 자신의 상념을 깨운 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성수신녀라고 하셨소?"
"그래요. 본녀가 바로 성수신녀 나설지예요. 누구시죠?"

"예. 소인은 이곳 정현 지부를 맡고 있는 놈입니다"

"그런데요?"

"지금 성수신녀 께서 하시려는 일을 제 목숨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허니 우리 아이들만은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예?"
"무량수불, 허허허"
"아미타불"
"원시천존"

파락호일 망정 기개가 남다른  경동각의 행동을 보고 일성 도장과 혜명 대사 그리고 유도옥이 동시에 이채를 발하며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수하들의 죄를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 갚겠다는 생각은 여느 명문 정파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허, 그 놈 참, 설지야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응? 철숙부 왜 그래?"

중간에 갑자기 불쑥 끼어든 철무륵이 설지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경동각의 옆구리를 발로 툭하고 건드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동각이 아니더냐? 동철이 동생 동각이?"
"예. 뉘신지..."


대충 봐도 강호의 명숙들이 분명한 이들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자 화들짝 놀란 경동각이 자신의 옆구리를 발로 건드린 이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눈에 '나 산적이오'하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사내 하나가 씨익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인상이며 더불어 상당히 익숙한 생김새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의 시간을 흘려 보내는 가운데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던 경동각의 머리 속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와 자신을 반겨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억과 조우함으로써 비로소 눈 앞에 있는 사내의 정체가 짐작되는 경동각이었다.

"서,설마, 륵아 형?"
"크하하하. 맞구나 동각이, 크하하하"
"철숙부 아는 사람이야?"
"그래, 이 놈이 바로 내가 일전에 네게 한번 이야기했던 그 고향 친구 녀석의 동생이다."

"아! 그 죽마고우라던..."
"그래. 바로 그 놈 동생이지."
"호호, 별일이네, 이런데서 고향 친구 동생분을 다 만나고..."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동각이 너는 언제 부터 이런데 있었던 것이냐?"

"아, 그게 륵아 형이 고향을 떠난지 두어해가 지났을 무렵이었을거야"
"크하하, 그랬구나. 그랬어."
"헌데 륵아 형은 여기 무슨 일이야?"
"응? 크하하, 하여간 그만 일어나거라, 네 눈 앞에 서있는 그 아이가 바로 내 질녀인 성수신녀다"
"응? 질녀?"

철무륵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손을 잡아 일으키자 엉거주춤 일어섰던 경동각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야 했다. 하지만 성수신녀 나설지의 모습은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철무륵의 가족 그 누군가와도 닮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호의 명숙들이 마치 보호라도 하듯이 뒷 쪽으로 쭉 늘어서 있는 성수신녀와 철무륵 사이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사정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드는 경동각이었다.

"그래, 이 놈아! 질녀, 어떠냐? 화사하고 곱지? 거기다 신녀라고 불릴 만큼 의술도 뛰어날 뿐더러 아까도 봤겠지만 무공도 단연 이거다, 이거"

그렇게 말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드는 철무륵이었다. 그런 철무륵의 표정에서는 설지를 아끼는 마음이 무륵무륵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 그,그렇구나. 헌데 형은 지금 어디서 뭣하는 거야?"

"응? 너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거냐?"

철무륵이 이렇게 묻자 당연한걸 뭘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경동각이었다.

"허 참! 야 이 놈아, 너 혹시 녹림 총표파자의 이름은 알고 있는게냐?"
"그야 당연히 알지, 철무르... 응? 설마?"
"크하하하, 그래 내가 바로 그 놈이다"
"나,난 여태껏 동명이인인줄만 알았는데..."
"크하하하"

"아유! 시끄러, 철숙부 좀 살살 웃어"
"응? 크하하하. 미안하구나. 오랜만에 같은 고향 놈을 만나서 이 숙부의 기분이 좋아서 그러니 이해하려무나"
"알았어. 그보다 철숙부 고향이 어디야?"

"응? 내 고향은 갑자기 왜?'

"그냥! 어딘지나 빨리 말해 봐"
"원 그 녀석 참, 실없긴, 알려주는거야 뭐 어렵겠느냐. 녹림 총표파자인 철무륵의 고향은 안휘성 임안이지. 되었느냐?"
"응! 알았어"

그렇게 대답한 설지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서있는 사도연을 내려다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연아! 방금 들었지?"
"응? 뭘?"
"철숙부 고향이 안휘성 임안이라는거 말야"
"응! 응! 들었어, 그런데 그건 왜?"

"잘 기억하고 있어, 혹시 다음에 연이가 다 커서 이 언니 없이 강호로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안휘성의 임안만은 절대 들러면 안돼, 알았지?"
"응? 아니 왜? 거긴 철숙부의 고향인데?"

"그러니까. 잘 봐봐, 안휘성 임안 출신의 한사람은 산적이지. 그렇지? 그리고 또 한사람은 파락호잖아. 거긴 물이 무척 안 좋은가봐, 그러니까 절대 가면 안돼 알았지"
"응~"

그제서야 농인걸 깨달은 사도연이 커다랗게 대답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가장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이는 단연코 초혜였다.

"호호호"
"허허허"

"허허허"

졸지에 물이 무척 나쁜 동네 출신으로 전락해버린 철무륵이 콧김을 씩씩 뿜으면서 설지와 초혜를 번갈아 노려 보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기를 풀풀 날리던 설지의 화가 철무륵의 동향이라는 경동각의 등장으로 어느새 많이 가라 앉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처분을 기다리던 파락호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끙, 하여간..."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을 흘려낸 철무륵이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잦아 들기를 기다려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놈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만 동각이 이 놈이 고향 친구 동생이라서 못본척 하기는 힘들겠구나"
"음... 철숙부 얼굴을 봐서 단전을 폐하고 근맥을 자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 죄를 물을거야"
"크하하. 고맙구나. 허나 동각이 녀석말고는 모조리 근맥을 잘라 버려도 이 숙부는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아냐 됐어. 지부장이라는 그 분의 됨됨이를 봐서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도록 할게. 허나 두번은 없어. 모두 잘 들으세요. 당신들 모두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르려 했으나 녹림 총표파자이신 철무륵 숙부와 정현 지부장의 인연을 생각해서 이번 한번은 눈 감아 드리죠. 대신 다른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죄를 물을 겁니다. 허나 또 다시 이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맹세컨데 흑사방은 중원에서 완전히 사라질거에요. 내 말 반드시 명심하세요"

찬바람이 한차례 휭하니 부는 것만 같은 경고를 날려 보낸 설지가 사도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아! 네가 정해. 이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물을지"
"응? 내가?"
"그래!,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괜찮아"
"응! 설지 언니"

그렇게 말한 사도연이 잡고 있던 설지의 손을 놓고 파락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진 후 고개를 조금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조그만 녀석이 나름대로 꽤나 고심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런 사도연을 지켜 보는 파락호들의 심정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서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하는 저 꼬맹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파락호들의 앞에서 무게(?)를 잡고 오락가락하던 사도연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뒤로 돌아서 설지를 향해 뛰어 갔다. 그리고 설지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소곤소곤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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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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