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껄껄! 내 짐작이 맞는가 보구려?"
"그러하옵니다. 폐하, 사하생의 애조인 비아가 서찰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서찰을? 짐에게 말이오?"

"예. 페하"
"허! 설지 그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할애비에게 서찰을 다 보낸게야, 어디 봅시다"
"예. 폐하. 비아! 전해드리거라"
"삑!"

그때 까지 대장군의 왼쪽 팔목 위에서 황제와 대장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비아가 허락이 떨어지자 팔목에서 폴짝 뛰어 내리더니 종종걸음으로 용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황제의 발목 바로 앞에 멈춘 비아가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껄껄, 그 놈 참, 언제 봐도 사람 같단 말이야. 괜찮으니 이리 올라 오너라"
"삑"

당금 대정국의 황제인 성화제가 스스럼 없이 자신의 무릎 위쪽을 비아에게 내어주며 하는 소리였다. 이에 소스라치게 놀란 대신들이 말리려 하는 사이에 이미 비아는 또 한번의 폴짝 도약 신공을 발휘하여 황제의 허벅지 위에 무사히 안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갑다는 듯 황제에게 부리를 비벼대는 비아였다.

"껄껄, 그래, 그래, 나도 반갑구나. 서찰을 가져 왔다고?"
"삑"
"오냐. 수고했다. 어디 보자..."

비아의 발목에 단단히 묶여 있는 가죽 주머니를 풀어낸 황제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찰을 꺼내려 했다. 그러자 황제의 곁에 시립해 있던 태감 기일융이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어찌 연원이 불확실한 서찰을 직접 만지려 하십니까. 소신이 미리 살펴보겠습니다"
"응? 뭐라? 연원이 불확실해? 혹여 서찰에 독이라도 묻어 있을까봐 그러는 것이냐?"
"소신은 그저 지엄하신 폐하의 안위를 위해 만일을 대비하자는 것 뿐이옵니다.

"짐이 기태감 자네의 충정을 왜 모르겠는가. 한데 말이네"
"예. 폐하, 하문하시지요'
"자네 다시 한번 곤욕을 치르고 싶은가 보군?"

"폐,폐하"
"껄껄껄, 이 놈이 제대로 심통이 나면 저번 처럼 또 다시 혼쭐이 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폐하. 송구하오나 당시는 성수신녀께서 워낙 짖궂으셔서 소인이 비아 저 놈에게 호되게 당하긴 했사오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옵니다'

"껄껄껄, 다르긴 다르지, 그때야 장난이었고 지금은 설지가 보낸 서찰에 독이 묻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암!"
"폐,폐하"

그렇게 대답한 기태감은 일순 알수 없는 한기를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황제에게 부리를 비벼대며 애교를 떨고 있던 비아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껄껄, 그때 관모를 빼앗겼었다고 했더냐?"
"예. 페하, 비아 저 놈이 소인의 관모를 탈취해 가서는 대전 처마 위에 걸어두었었습니다"
"껄껄껄. 대정국의 태감이 관모를 빼앗겨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보았다면 정말 즐거워 했을 것이야. 생각만으로도 재미있구만, 껄껄껄, 헌데 오늘은 관모로 그칠 것 같지가 않구나"

"폐,폐하!"
"껄껄껄, 되었다. 짐이 비아와 설지를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어디 보자, 그렇지, 대장군! 대장군이 먼저 살펴보시겠소"
"예. 폐하, 허면 소신이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용상 곁으로 올라온 대장군이 비아에게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부리를 이용하여 발목에 묶인 가죽 주머니에서 서찰을 꺼내든 비아가 대장군의 손에 그 서찰을 쥐어 주었다. 한편 비아에게서 서찰을 받아든 교남천은 반가운 표정으로 서찰을 펼친 후 읽어 내려가다가 어느 구절에서 부터 표정을 딱딱히 굳혀가고 있었다. 이에 지켜 보던 성화제 역시 심상치 않은 내용이 서찰에 적혀 있음을 감지했다.

- 뭐라고 적혀있소? 혹여 역병이라도 돌고 있다고 하는게요?
- 그건 아니옵니다. 폐하, 서찰에 의하면 황궁에 마교의 간자가 잠입해 있는 것 같사옵니다.
- 뮛이? 마교의 간자?
- 예.폐하. 상세한 것은 서찰에 모두 적혀 있사오니 직접 살펴보시고 내색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그리하리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전에 도열한 대신들을 등지고 서찰을 읽어 내려가는 대장군과 그런 대장군을 지켜보던 성화제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군 교남천은 무장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지만 절정 고수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시전이 가능하다는 전음을 성화제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구사한다는 것은 분명 뜻밖의 일이었다.

"껄껄, 그래 설지 그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짐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오?"
"예. 폐하. 서신에 적혀 있기를 사하생이 일행들과 의행을 나온 김에 황궁 구경을 하기 위해 들른다고 합니다."
"뭐요? 황궁 구경? 껄껄껄, 설지 그 녀석다운 생각이로구나. 이보게 기태감"

"예.폐하"
"설지가 일행들과 함께 온다고 하니까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겠네"
"예. 폐하, 심려마시옵소서"

"대장군! 서찰에 노도사도 함께 온다고 적혀있소?"
"예. 폐하 무당의 일성자도 함께 온다고 되어 있사옵니다. 직접 읽어 보시지요"
"그럽시다. 이리 줘 보시오"
"예. 폐하, 여기 있사옵니다"

속마음과 달리 황제와의 대화를 통해 서찰의 내용이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든 대장군이 서찰을 건네준 후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시선으로 대신들을 한차례 스윽 둘러 보았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무척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대장군 교남천의 머리 속은 상당히 복잡해지고 있었다. 간자를 가려낼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껄껄. 이 녀석 보게, 대뜸 짐더러 일을 똑바로 하라고?"
"송구하오나 폐하, 일전에 보고드린 박산현의 일 때문이옵니다."
"박산현! 그래 그 일을 생각하면 짐이 설지 이 놈에게 이런 소리를 들는 것도 당연하겠지"

박산현의 일로 자책하는 성화제를 보며 기태감이 호들갑을 떨었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되었다. 모든게 다 짐의 부덕함 때문이야."
"폐.폐하"

"어허, 되었데도, 그보다 비아 이 녀석 먹을거리나 좀 챙겨오너라."
"예. 폐하"

성화제의 명을 받은 기태감이 젊은 환관 하나에게 눈짓을 했다. 이에 지목당한 젊은 환관이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것을 보던 교남천이 환관의 발을 붙들었다.

"잠시 기다리거라"
"예? 예! 합하"
"응? 왜 그러시오? 대장군"

"예. 폐하. 그것이 비아 저 녀석은 날것을 먹지 않습니다. 해서..."
"아 참! 그렇지, 이 녀석이 어릴 때 부터 익힌 것만 먹어 왔다고 했었지"
"예. 폐하, 맹금의 야성으로 인해 혹여 잦은 살생이 벌어질까 저어한 사하생이 그렇게 버릇을 들였습니다"

"껄껄, 보면 볼수록 신통한 놈이란 말이야. 그 어린 것이 거기 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말이야, 그렇지 않소?"
"예. 폐하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기태감 들었느냐?"
"예. 폐하. 허면 구운 오리 고기 한마리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기태감이 다시 젊은 환관에게 눈짓으로 명령하자 명을 받은 환관이 순식간에 대전에서 사라져 갔다.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환곤의 뒷 모습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던 성화제가 다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 앉은 비아에게 시선을 주며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비아 네 생각은 어떠냐? 짐과 함께 황궁에서 살지 않겠느냐? 맛있는 것은 뭐든 짐이 먹게해주마"
"삑?"

하지만 성화제의 그 은근한 유혹에도 비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으로 의문을 표했다. 마치 '뭐라는거야?'라는 듯이...

"폐하! 서찰의 마지막을 한번 보시옵소서"
"응? 마지막? 뭐가 더 있소?"
"안력을 돋우어 보시면 보이실 것이옵니다'
"그렇소? 어디... 응? 껄껄껄"

황궁에 드리운 암운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대전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 설지가 보낸 서찰의 말미에 안력을 돋우워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비아 탐내지 마세요!'

한편 비아가 황제를 만나고 있던 그 다음 날 아침, 사도연은 요상야릇한 태극권의 모든 동작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차례 시전한 후 현진 도사의 손을 잡고 근처의 야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조금만 뒤적거리면 먹을게 지천으로 늘려 있다보니 사도연과 현진 도사의 산행은 이처럼 두 사람에게 어느덧 일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후아! 힘들어"
"좀 쉬어갈까?"

"아냐, 괜찮아, 그보다 현진 오라버니, 오늘은 저쪽으로 한번 가봐"
"그럴까? 머루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치?"
"응!"

고개를 끄덕인 사도연이 비탈길에서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겨 숲속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사도연의 발걸음은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금새 멈추어졌다. 눈 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응? 왜 그래? 앞에 뭐가 있니?"
"오,오라버니"
"왜 그래?"

갑자기 멈추어선 사도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낀 현진 도사가 사도연을 자신의 뒤로 급히 잡아 당긴 후 시선을 앞쪽으로 주었다. 그러자 앞서가던 사도연을 놀라게 했던 끔찍한 광경이 현진 도사의 눈에도 뚜렷이 드러났다. 누군가가 쳐놓고 잊어버린 듯한 오래된 올가미에 커다란 토끼 한마리가 걸려든 채 나자빠져 있었고 그 주위로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새끼 토끼 여러마리가 미동도 않은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무량수불, 쯧쯧 어쩌다가..."
"다 죽은거야?"
"응, 그런 것 같아.
"불쌍해"
"묻어줘야겠다. 좀 도와줘" 
"응!"

근처의 땅을 힘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파헤친 현진 도사가 먼저 어미로 보이는 죽은 토끼를 올가미에서 분리한 후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안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러자 사도연도 주위에 있는 어린 새끼들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어미의 곁으로 옮겨다 주기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몸 전체는 검은색이지만 목 둘레와 더불어 이마에서 코 까지가 길게 세로로 하얀 털에 덮여있는 작은 토끼를 안아들던 사도연이 깜짝 놀란 부르짖음을 터트렸다. 안아들려는 순간 죽은 것 처럼 미동도 않던 토끼가 한차례 꿈틀했던 것이다.

"오,오라버니, 이 녀석 아직 살아 있어"
"응? 어디 봐"

사도연의 말 그대로였다. 탈진하긴 했으나 작고 검은 토끼의 숨결이 실낱 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숨결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현진 도사가 미약한 내공을 불어 넣어주자 다 죽어가던 토끼의 움직임이 조금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대로 두면 작은 토끼는 얼마지나지 않아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때?"
"글쎄? 살아있긴 한데 가망이 없어 보여"
"설지 언니에게 데려가면 살릴 수 있을까?"

가망이 없다는 말에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떠올렸던 사도연이 설지를 생각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맞아, 설지 언니라면 틀림없이 살릴 수 있을거야"
"그,그렇겠지"

자신이 없긴 하지만 사도연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없는 현진 도사였다. 실망한 사도연의 모습을 보기도 싫었지만 내심으로는 설지라면 다 죽어가는 작고 어린 생명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럼, 빨리 가"
"그,그래, 우선 이 놈들 묻어주고..."

다급한 손길로 어미와 죽은 토끼들을 묻어준 두 사람이 서둘러 걸음을 옮겨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작은 봉분 하나가 새로 생겨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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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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