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혈사교

나운영은 품에 안긴 설지의 수혈을 짚어 잠을 재우고는 나운학에게 물었다.
"운학아! 운해는 어떻게, 어떻게 되었느냐?"
"예. 아버님. 그, 그것이... 검에 의해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하셨습니다."
"뭐라? 검이라고? 누가 감히 성수의가의 가주에게 검을 들이댔다는 말이더냐?"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하는 나운영의 음성에 담긴 비탄과 노기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가 장내로 퍼져 나갈 쯤에 장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성수의가의 의원들이었다. 나운영은 숨을 깊이 한번 들이마신 뒤 장내에 도착한 의원들에게 일갈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여 흉수가 남긴 흔적을 찾고 일부는 저기 있는 흑색 무복을 걸친 놈들의 시신을 뒤져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져 오거라."
"예 어르신"
나운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수의가에서 달려나온 삼십여명의 의원들은 재빠르게 퍼져 나가며 주변을 수색하고 시신들의 몸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감히, 감히, 성수의가의 가주를 참살하다니 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의원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나운영의 읊조리는 음성에는 진한 살기마저 내포되어 있어 곁에 있던 하인 몇명이 순간 몸을 잔뜩 움츠리기까지 하였다.

빠르게 주변 정리를 하는 의원들의 손길이 마무리 될 즈음 장내에는 또 다시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남루한 차림의 복색을 걸친 거지들 십여명이었다. 그런 거지들의 선두에는 허리에 여섯개의 매듭으로 된 허리띠를 맨 건장한 체격의 중년 거지 하나가 있었다. 그는 바로 개방의 육결 제자인 취걸개 방융으로 개방의 장로와 후개를 제외하면 현 개방의 최고위층 인물인 동시에 개방주 팔선개 취타의 사제인 인물이었다.

귀주성의 귀양 개방 분타에 분타주로 와 있던 방융은 아침에 개방도가 잡아온 개 한마리를 끌고 성수의가 앞의 서강으로 분타 식구 대부분을 데리고 나와 있다가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황급히 개방의 식솔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개방의 육결 제자가 다른 곳도 아닌 귀양의 분타주로 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호에서 성수의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반증인 셈이었다.

서둘러 달려 왔지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방융은 장내를 한번 쓱 둘러보고는 함께 온 거지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더니 곧장 나운영에게 다가와 깊숙한 포권지례를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방융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방융의 인사를 받은 나운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인사를 받았다.
"어서오시게. 괜히 의가의 일로 자네들 까지 고생하는군."
"아닙니다. 어르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으나 저기 한쪽에 시신으로 누워 있는 붉은 장포를 걸친 젊은이가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쫓기는 것을 가주가 치료하고 도와준 모양일세. 그런데 저 젊은이를 쫓던 놈들이 추격해 와서는 다짜고짜 가주를 참살하고 설지 마저 없애려다 여기 두 마리 호랑이에게 대부분이 죽고 몇놈이 살아서 도망갔다고 하는군."

나운해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운영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을 듣고 있던 나운학의 안색은 나운영의 말이 진행될수록 굳어지는 것 같더니 나운영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잔뜩 얼굴을 굳힌채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그런 나운학의 두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다. 하늘을 보며 장탄식을 토해낸 나운학은 나운영의 품에 안긴채 잠들어 있는 설지를 측은한 듯 바라보더니 머리 칼을 쓰다듬어 주고는 나운영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버님. 어떻게 할까요?"
"갚아줘야 되겠지. 허허, 삼백년 성수의가 역사 이래 내 대에 이르러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허허허, 내가 너무 오래 산게야. 암 그렇고 말고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나운영의 푸념 같은 읊조림이 끝날 때 쯤 해서 장내는 이미 정리가 마무리 되었고  흑색 무복을 걸친 시신들의 품에서 찾아낸 여러가지 물건들이 나운영의 발 아래 가지런히 놓이고 있었다. 품에서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이 전낭들과 같이 별다른 특색이 없는 것들이었으나 붉은 칠을 한 손바닥 크기의 목패 열세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 붉은 목패의 앞면에는 검은 글씨로 혈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편에는 제작기 다른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상체를 숙여 목패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든 나운영은 목패의 앞뒤를 찬찬히 살펴보다 곁의 방융에게 목패를 넘기며 물어 보았다. 방융의 손에 건네진 목패의 전면에는 혈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십일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언지 아는가?"
"예. 어르신 이 패는 혈패라고 불리는 것으로 혈사교도를 증명하는 신패입니다."
"혈사교도라고?"
"예, 혈사교라고 무서운 기세로 세를 불려나가며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세를 확장한 방파인 혈사교의 교도임을 나타내는 패입니다. 혈사교는 스스로 혈사교라고는 하지만 광신도 집단은 아니고 단순히 교의 이름을 사용하는 무림방파이며 강서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강서성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다는겐가?"
"예 그렇습니다."

방융의 말을 들은 나운영은 한참을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나운학을 돌아보며 불쑥 말을 뱉었다.
"운학아! 이제부터 네가 성수의가의 가주니라. 성수의가의 가주로 혈사교에 네 형의 목숨 값을 받아오거라. 내공 한줌없는 의원에게 그것도 성수의가 가주에게 살수를 펼친 놈을 비롯해서 혈사교의 교주와 이번 일에 관련 있는 놈들 모두에게 그 죗값을 물어야 할것이야."
"예. 아버님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성수의가의 가주 자리는 설지가 장성할 때 까지만 맡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나운학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운영은 아들의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후,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겠지. 네 마음대로 하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운학의 말이 끝나자 나운영은 설지를 나운학에게 넘겨주고 아들인 나운해 부부의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아들 부부의 시신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나운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운학은 품에 안은 설지를 한번 내려다 보고는 방융에게 말했다.
"방분타주. 개방의 연락망을 좀 이용해야겠소이다. 도와주시겠소."
"허허. 그리하십시오. 성수의가의 가주께서 연락망이 필요하시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소이까?"
"고맙소이다. 혈사교에 보내는 배첩을 부탁드리겠소이다."

나운학과 말을 나누면서도 방융은 사실 무척 곤혹스러웠다. 앞으로 이 일이 무림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사람들이 그저 의가로만 알고 있는 성수의가가 지닌 무력을 아니 곁에 서있는 신임 성수의가주가 지니고 있는 무력을 개방의 육결 제자이자 개방주의 사제인 자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수의가를 건드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혈사교가 너무 늦지 않게 깨닫게 되기를 방융은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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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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